구약 BIBLE/시편

시편9편 성경주석

홍페이지 2022. 4. 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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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편 서론>

다윗의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

시 9편은 감사의 노래로 불려 왔다. 이 시는 악인들을 벌하시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직 한 절(13절)만이 불길한 음조로 이 노래 전체에 흐르는 승리의 선율을 차단한다. 이 시는 답관체 시들, 곧 알파벳의 순서에 따른 시들 중 첫 번째 것이다. 하지만 이 시의 답관체 형식이 이 형식으로 지어진 다른 몇몇 시들에서처럼 엄격히 적용되지는 않았다. 첫째 연의 각 행이 히브리 철자의 첫 글자인 알레프(’alep)로 시작한다. 그 후에는 단지 각 연의 첫째 행만이 이 법칙을 따르고 있는데, 그것마저도 이 법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매우 규칙적으로 구획된 이 시는 동일한 길이로 된 열 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에서는 답관체 시들에서 통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상을 형성하는 데 어떤 두드러진 진전이나 연속성은 없이 그저 그 사상이 여러 다른 측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기만 한다. 이 시에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삼하 8장이 이 시가 지어진 적절한 배경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몇몇 히브리어 필사본들과 「70인역」 그리고 「불가타역」에는 9편과 10편이 하나의 시로 되어 있다.

* 뭇랍벤(Muth-labben) : 의미는 모호하다. 어떤 히브리 필사본들은 무트(mut) 앞에 "위에"(「제임스왕역」)로 번역되는 알('al)을 결합해 알무트('almut)라고 한다. 그러나 이 복합어도 설명할 수 없는 전문용어이다. 「70인역」은 이 복합어를 따라 알무트 랍벤('almut labben)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의미는 "아들의 감추어진 것들에 관하여"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어떤 음조의 명칭이거나 첫 구절이며 "아들을 위하여 죽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편 9편 개역개정>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13.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17.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라)

 

 

<시편 9편 성경주석>

9:11. 전심으로. 

매우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시가 시작된다. 이 시에서는 애정의 분열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더 나아가 그의 감사의 표현은 그저 입술로만 하는 표현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는 표현이다.

9:1 주의 모든 기사를.

 시인의 찬양의 직접적인 주제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복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3~5절에 하나님의 특정한 개입이 언급되어 있다.

9:2 지극히 높으신.

 히브리어 엘룐(‘Elyon). 참조 시 7:17 주석.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다.

9:2 찬송하리니.

 히브리어 자마르(zamar), “시”를 의미하는 미즈모르(mizmor)라는 명사의 어근. 자마르에는 “노래하다”와 “악기를 연주하다”의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다.

9:3 주의 앞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원수는 엎드러진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9:4 나의 의와 송사.

 하나님은 의로운 송사를 변호하셨다. 그는 변호자이다.

9:4 앉으사.

 보좌에 앉아서(참조 7절) 송사의 시시비비를 결정하는 재판장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그의 판결은 시인의 편을 든 판결이다.

9:5 열방.

 (「제임스왕역」에는 “heathen”[이방]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고임(goyim), “나라들”(참조 시 2:1 주석).

9:5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어떤 민족이 정복당하면 이 땅에 있는 나라들 중에서 그 이름이 존속되지 않는다.

9:6 원수.

 이 절의 첫 행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원수-그들은 소멸될 것이다-곧 영원한 황폐”이다. 이 절은 원수의 완전한 멸망을 묘사한다.

9:7 여호와께서.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헴마(hemmah)와 더불어서 6절이 끝을 맺는다. 이 단어는 “그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말이 문맥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번역판에서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가릿어에서 헴마가 “보라”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참조 68, 69쪽). 만약 헴마가 여기서 그 같은 의미로 쓰였다면 이 단어는 7절의 맨 앞에 위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되면 7절의 앞부분이 “보라,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가 된다. 시인의 시대에는 쓰이지 않던 구두점을 헴마의 뒤가 아닌 앞에 찍으면 이 시의 답관체 형식이 보강된다. 이 같은 조정은 7절을 히브리어 철자 헤(he)로 시작하게 만든다. 현재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9:7 앉으심이여.

 (「제임스왕역」에는 “shall endure”[지속할 것이다]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앉다.” 6절의 멸망과는 전혀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심판을 행하면서 영원히 그 재판석에 앉아 계신다. “만상이 변하고 쇠퇴함을 보오니 오, 변치 않는 당신이시여, 나와 함께하소서!”

9:8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참조 계 20:12, 13. 하나님은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서 자신을 의로운 재판장으로 드러내신 것처럼 마지막 심판에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넷째 연을 구성하는 7절과 8절은 답관체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9:9 산성.

 히브리어 미스가브(misgab), “안전한 고지(高地).” 참조 시 18:2; 46:7; 48:3.

9:10 주의 이름을 아는.

 참조 시 5:11; 7:17 주석.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의 품성을 익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

9:10 의지하오리니.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행위의 공정성을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다(참조 시 62:8; 64:10; 111:5).

9:10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버리지 않는다.

9:11 시온.

 참조 시 2:6 주석; 시 3:4; 5:7.

9:11 찬송하며.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의 인자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와 함께 그를 찬양할 것을 요청한다.

9:11 백성 중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열방에 선포됨으로 그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또한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참조 시 105:1). 이 사상은 시편 전체에 흐르는 사상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 교훈을 깨달았다면 바리새인들이 행한 완고한 배타적 행위들은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9:12 심문하시는.

 “심문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가 “찾다”로 번역된 창 9:5을 참고하라. 하나님이 죄 있는 자들을 벌하러 나아오는 형집행자로 묘사되어 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극악한 범죄행위이다. 피의 보수자인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간과하실 수 없다(참조 창 4:10). 그는 이스라엘의 최근친이며, 무죄한 피흘림에 대하여 복수하기로 서원하였다.

9:12 가난한.

 다시 말해서 “고통받는.”

9:13 사망의 문.

 히브리인들은 사망을 죽은 자들의 상징적인 거처인 셔올(s∨e’ol)과 연관시켰다. 시적인 영상에서 이 셔올은 문들이 있어서 그 출입이 통제되는 장소로 여겨졌다(사 38:10). 바벨론적 개념에서는 셔올이 죽은 자들을 가두어 놓는 성읍이었는데, 이 성읍은 그들이 산 자들의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빗장이 이중으로 된 일곱 개의 문이 있는 칠중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인은 자신이 사망의 문에 너무나도 가까이 이르러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를 거기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지금 그가 처해 있는 위험 중에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분을 바라본다. “사망의 문”이라는 구절은 시 107:18에도 나온다. 시 9편 전체에서 오직 13절에서만 연속적인 승리의 선포가 중단된다.

9:14 전할 것이요.

 죽은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시 88:10~12; 115:17) 시인은 산 자들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그에게 청한다.

9:14 딸 같은 시온.

 (「제임스왕역」에는 “daughter of Zion”[시온의 딸]로 되어 있음-역자 주). 예루살렘의 거민들. 시온 곧 예루살렘은 모성(母城)으로 여겨졌다. 여기와 위의 11절에서 “시온”이란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이 시가 시온 곧 예루살렘이 나라의 수도와 예배의 중심지가 된 후에 지어진 시임을 보여 준다.

9:14 문.

 “사망의 문”(13절)과는 대조적으로 이 문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소식을 나누는(고대에 일간 신문 같은 역할을 함) 성읍의 입구에 위치해 있는 문이었다. 그곳은 (헬라인들의 아고라나 로마인들의 포룸처럼) 어떤 소식을 널리 알리기에 편리한 장소였다.

9:15 열방.

 (「제임스왕역」에는 “heathen”[이방]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시인을 향하여 포진하고 있는, 우상을 숭배하는 열방들(참조 시 2:1; 9:5 주석).

9:15 웅덩이에.

 이 구절과 다음 구절은 시 7:15과 동일한 사상을 표현한다. 포획 놀이의 두 가지 방식이 여기서 비유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사상이 아래 16절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이 형벌은 그 범죄에 적합한 형벌이다.

9:16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열방의 해악이 그들 자신들의 머리로 되돌아가도록 함으로 하나님이 그의 구원하는 능력을 만민 앞에 드러냈다.

9:16 그 손으로.

 참조 15절; 시 7:15.

9:16 힉가욘.

 이 단어는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는 “묵상”으로 번역된 시 19:14과 “정숙한 소리”로 번역된 시 92:3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는 뜻이 모호하다. 또한 이 시의 이 지점에서 왜 이 말이 첨가되었는지를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이것은 음악적 음향 또는 공적인 연주 때의 막간을 표시하는 것일 수 있다.

9:17 돌아감이여.

 문자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가 3절에서는 “물러가다”로 번역되어 있다.

9:18 궁핍한 자.

 이 단어와 이 절의 후반부에 나와 있는 “가난한 자”라는 단어는 빈곤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압제의 희생자들까지도 의미한다(참조 12절 주석). 궁핍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은 구약의 위대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

9:18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17절의 “잊어버린”이라는 단어에 대한 말놀이. 하나님은 그의 구원과 보호가 필요한 자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9:18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구원에 대한 열렬한 소망을 의미한다.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이 항상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9: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시인은 하나님께 이 땅의 심판자로서 그의 자리에 앉으시라고 엄숙하게 호소한다(참조 시 3:7 주석)

9:19 인생.

 히브리어 에노쉬(’enos∨). 힘있는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는 약하고 무력한 모습의 “사람”을 가리킨다(참조 시 8:4 주석).

9:19 목전.

 히브리어 파네(paneh), 문자적으로 “얼굴.” 우가릿어(참조 68, 69쪽) pn도 얼굴을 의미하긴 하지만 이에 더하여 “뜻” 또는 “목적”이라는 의미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실례를 아마르나 편지에 사용된 가나안어 파누(pa

 nu)에서 찾아볼 수 있다(참조 제1권, 116~118). 따라서 여기와 다른 몇몇 구절들(이 단어가 “진노”로 번역된 시 21:9, “면책”으로 번역된 시 80:16, “낯”으로 번역된 시 82:2)에서는 파네(paneh)가 “뜻”으로 번역되는 것이 옳은 듯하다. 이같이 번역하면 이 본문은 “열방으로 주의 뜻을 따라 심판을 받게 하소서”가 된다.

9:20 두렵게.

 히브리어 모라(morah). 이 단어는 그 자음의 구성이 “선생”을 의미하는 단어와 동일하다. 「70인역」과 「수리아역」은 이 독법을 따른다. 어떤 번역판들은 모라(morah)를 모라(mora’), “두려움”의 철자를 잘못 쓴 것으로 간주한다(「제임스왕역」, 「개정표준역」). 또 다른 이들은 이 단어를 므에라(me’erah), “저주”의 철자를 잘못 쓴 것으로 본다. 이 경우에는 이 구절이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다”로 번역된다.

9:20 인생.

 히브리어 에노쉬(’enos∨). 19절에 나온 것과 동일한 단어. 이 시는 온 땅의 심판자의 눈에 비친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강조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