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BIBLE/창세기

창세기11장 성경주석

홍페이지 2022. 5. 1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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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장 줄거리>

1. 통일된 언어

7. 언어의 혼잡

10. 셈의 자손

27. 데라의 자손

31. 하란으로 이주한 아브람

 

<창세기 11장 개역개정>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6.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25. 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세기 11장 성경주석>

11:1 온 땅.

  어떤 한정된 지역이나 그곳 주민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Living Bible은 '전 인류(All mankind)'로 공동번역은 '온 세상'으로 번역하였다.

11:1 언어가 하나요.

  직역하면 '한 입술'.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인류의 언어가 동일했음을 강조하는 환유법적 표현이다. 이러한 언어의 통일성은 인류가 한 조상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인증해준다.

11:1 말이 하나였더라.

  직역하면 '한 낱말'. 이는 당시 언어의 형태나 단어, 그리고 뜻이 인종이나 민족, 지역간을 막론하고 같았음을 뜻한다. 이러한 언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특별한 의사소통 기능인데 바벨탑 사건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혼잡된 언어는 비록 비교 언어학, 언어 분석학 등이 끝없이 발달한다 해도 인간 머리만으로는 그 통일성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11:2 동방으로.

  대홍수 후 노아 가족 및 그 후손들이 거주하였던 아라랏(8:4)에서 바벨론은 정확히 남동쪽이 된다. 그러나 이를 가리켜 '동방'이라 한 것은 기본 방향만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1:2 옮기다가.

  옮기다가(*나사) 원 뜻은 '잡아 뽑다(사33:20)'로 유목민들이 이동할 때마다 유숙하기 위해 쳐놓았던 장막의 말뚝을 뽑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민2:34)

11:2 평지.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크아'의 본래 의미는 '나누인 사이', 즉 산과 산 사이의 비교적 넓고 평평한 골짜기를 가리킨다. 그러나 70인역이 이를 '페디온'으로 번역하고 있듯 여기서는 상당히 넓게 펼쳐진 평야 지대를 가리킨다. 이 같은 장소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길을 나섰던 유목민들의 눈길을 단번에 끌었을 것이다.

11:3 서로 말하되.

  직역하면 '각자 그 이웃에게 얘기하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배척하면, 인간끼리의 중지를 모아 일을 결정하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결의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11:3 견고히 굽자.

 문자적 뜻은 '굽고 또 굽자', 햇볕으로 벽돌을 건조시키는 것이 고대인들의 일방적 방법이었던 점에 비추어 불로서 벽돌을 굽는 이 방법은 당시 그들의 문명이 상당한 수준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증거해주고 있다.

11:3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자연석이 풍족하지 못했던 시날(바벨론)지역에서 가마를 이용, 벽돌을 구워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은 문명의 개가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불에 구운 벽돌은 자연석보다 더 내화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11:3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벽돌과 벽돌을 견고하게 접착시키는 데에 진흙이나 회반죽 대신 역청을 사용하였음을 뜻한다. 여기서 '역청'(*헤메르)은 '끓다'란 뜻의 '하르마'에서 파생된 말로 바벨론이나 사해 부근의 지하 분수지에서 기름(Oil)처럼 끓어 오르는 역청(*아스팔토스)을 말한다.

11:4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여기서 '성(*이르)'은 '도시','성읍'을 의미하며 이는 곧 대제국 건설과 이를 기념하는 탑을 건설하려 한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건축 공사를 실행한 주체는 니므롯 왕조(10:8-12)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1:4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내가 하늘에 올라...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사14:13)고 한 사단의 자만과도 같은 자만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마11:23)고 경고하신다.

11:4 우리 이름을 내고.

 직역하면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새기고'. 이는 바벨탑을 건축한 일차적 동기로 무실론적인 인본주의와 허망한 인간의 명예욕을 드러내 준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각자 벽돌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벨탑 건축자들의 이름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아이로닌칼하게도 자신을 드러냄없이 주를 위해 겸허하게 살다간 주의 종들의 발자취는 길이 남아 비치나고 있다(히11:4-40).

11:4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바벨탑 건축의 두번째 동기로 가인의 후예들이 가인이 받은 땅에서의 유리 방황하는 저주(4:12)를 인간적인 수단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는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류가 번성하여 땅에 널리 퍼지고 충만하는 것이었지 결코 각 개체들의 자주권이 억압당하는 세계적 단일 제국 형성에 있지 아니하였다(1:28;9:1).

11:5 여호와께서...내려오셨더라.

 간견적 형태의 현현(출19:20;민12:5)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행위를 간섭하시고 중재하시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을 뜻하는 신인 동형동성론적 표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간섭은 자신에 대해 반역하는 교만한 인간들을 징계하고 심판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7,8절) 이를 가리켜 한 유대 랍비는 '하나님이 자비의 보좌에서 심판의 보좌로 내려오셨다'라고 평하였다.

1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중심에 이르시되'(8:21)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서 이미 마음 속에 스스로 결정해 놓았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11:6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인류 공동체적 범죄가 가능했던 조건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단일 언어를 주신 것은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인간은 오히려 이것을 악용하였으나 그 결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선물을 거두어 가신 것은 당연하다.

11:6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직역하면 '이제는 그들로부터 그들이 하려고 마음 먹은 것들을 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하나님께서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는 그들의 불순한 생각이 절정에 달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일 뿐이다(3:22).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5절과 동일한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은 단일한 신성가운데 영원하고 동일한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해 주는 구절로 볼 수 있다. 또 여기서 '자(Come)'는 4절과 대조되는 것으로 삼위 하나님이 서로에게 다짐하며 권유하는 형식의 말인데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 목적이 동일함을 나타낸다(요6:38,39).

11:7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못하게 하자.

 '혼잡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발랄'은 '뒤섞다'는 뜻이다(레2:4;민15:6).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언어를 분리, 단절시키셨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본절은 언어란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는 문화 유산이기는 하나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강권적인 언어 분리 사역에 따른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분명히 증거해준다.

11:8 여호와께서...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단순히 인류를 징계하려는 데만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 땅에 충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명령하신 축복이며 따라서 인간의 역반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이 이를 강권적으로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역사 속에 성취시키시는 신실한 분인데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삼상15:29)

11:9 바벨.

 이 단어의 유래에 대하여는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혼잡하다'를 의미하는 '바랄'이 '발벨'로 발전되었고, 이어 이 단어에서 (*라멜)이 생략되면서 결국 '혼잡'을 의미하는 '바벨'이 된 것이다. 둘 째, 본래 '신의 문'을 의미하는 '밥일'로 부터 유래한 단어이다.(Gesenius, Rosenmuller). 이 두 견해 중 문맥상 '바벨탑'에 적합한 의미는 전자인 듯 하다. 한편 오늘날 고대 바벨탑의 유적으로 가장 유럭시되는 탑이 두개 있는데 곧 마르둑(Marduk)신전의 '에테메난키(Etemenanki)탑'이다. 이 중 전자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기초만 남아있을 뿐, 그 본래 구조와 형태는 알아볼 수 없다. 그리고 후자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역청과 벽돌로 된 구조물이 아직도 7층 높이로 남아 있다.

11: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이는 10:21-31에 나온 셈 계보의 단순한 반복 기술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계보를 밝히기 위해 특별히 쓰여진 것인데 여기에는 셈에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는 계보가 연대기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11:11,12 사십 오 세에...사백 삼 년을 지내며.

 인간 범죄로 말미암아 노아 홍수 이후 계속해서 인간의 득남 연령과 수명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홍수 이전까지의 족보(5:6-32)에는 65세에서 187세 사이에 득남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본절로부터 26절의 족보에는 29세에서 100세 사이에 득남한 것으로 나와 있다. 또한 수명에 있어서도 홍수전 족장들의 평균 수명은 858세였으나 홍수 후 평균 수명은 317세였다.

11:18 르우.

 '친구','동료'란 뜻으로 이 이름은 그가 하나님과 벗하는 자였음을 나타내준다. 우리는 여기서도 아라비아족 계통의 욕단 후예와 아브라함족 계통의 벨렉 후예(10:25)간의 차이점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11:26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

 나홀이 하란의 딸과 결혼한 것(29절) 및 12:4 등에 근거할 때 하란이 데라의 맏아들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기자가 아브람을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그의 영적 장자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1:27 데라는 아브람과...낳고

 아브람의 출생 연대를 성경 기록에 따라 역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왕상6:1에 근거한 출애굽 연대 B.C.1446년에 이스라엘의 애굽 체재430년(출12:40),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의 연령 100세(25:26), 야곱이 애굽에 이주할 당시 나이 130세(창47:9)를 모두 더하면 B.C.2166년이란 아브라함 출생 연대가 나온다. 그러나 출애굽 연대에 대하여서도 학자들마다 차이를 보이며, 성경 족보도 중간마다 생략된 경우가 많으므로 이는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연대일 뿐이다.

11: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죽었더라.

 여기서 '그 아비보다 먼저'의 문자적 의미는 '그 아비 면전에서'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아비가 살아 있을 때에'로 봄이 타당하다(Luther, Calvin, Rosenmuller). 그러나 유대 전승에 의하면, 당시 데라는 화신 숭배자였는데 아들 하란이 이를 거부하자 그들 당국에 고소, 자신의 면전에서 불에 타죽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의 사실성은 믿기 어렵다. 아무튼 하란의 죽음은 성경상 아비보다 먼저 죽은 최초의 경우로 (1)인간 수명이 더욱 단축되었음을 시사하며 (2)죽음은 그 누구에게도 순간적으로 엄습할 수 있음을 경고해준다.

11:29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아브람'의 뜻은 '고귀한 아버지'로 선민의 조상인 그에게 걸맞는다. 그리고 '사래'는 '나의 공주'란 뜻이다. 후일 이 이름은 하나님에 의해 각각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과 '사라'(여주인)로 바뀌는데(17:15) 이는 그들이 지엽적 존재에서 믿음의 조상이란 거시적 존재로 변모 되었음을 뜻한다.

11:29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나홀의 조카 딸과 결혼하였듯이 아브람 역시 이복 누이와 결혼하였다.(20:21) 이러한 근친 결혼은 족장 시대에 있어서는 (1)지리적, 문화적 여건상 불가피하였거나 (2)혈통 우월주의에 입각한 종족 보존 방법일 수 있었고 (3)또한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방법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구 증가 및 확산이 이루어졌고 한 가정의 성적 순결 유지가 더욱 중요하게 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근친 결혼을 공식적으로 금하셨다.(레18:1-18)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성적 혼란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신을 깨닫고 그 뜻을 철저히 준행하여야 한다.

11:29 하란은...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이스가'의 뜻은 '선견자'이다. 그런데 밀가에 대한 기록은 다른 곳(22:20-23;24:15;24:47에서도 나오지만 이스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그녀가 왜 여기에 언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1:30 사래는...자식이 없었더라.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될 자인 아브라함이 이때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자식을 신의 선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이가 없다는 것은 신의 은총에서 제외된 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급속히 번식해 나가던 이방 족속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은 그분의 엄밀한 계획하에 있었으니 이는 마치 씨앗이 땅 속에서 발아의 때를 기다리듯 아브람의 씨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잠시 대기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었다.(17:1-8)

11:31 데라가...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데라가 무엇 때문에 그의 본토를 떠났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행7:2,3에서 스데반이 말한 것처럼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읭 부르심이 주요 동기였을 것이다. 물론 이 외의 다른 요소들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던 것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에는 갈대아 우르를 떠난 무리 중 나홀이 빠져 있는데 24:10에 나홀이 우르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옮겨간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먼저 데라 일행이 이주 한 후 나홀의 가족도 뒤따라 이주한 것 같다.

11:31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이곳은 당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거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곳으로 아브람을 인도하려 작정하셨으며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히11:8)서도 그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맏음의 순례 길을 떠난 것이다.

11:31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의 노쇠함 때문에 가나안으로의 여행이 이처럼 잠시 지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데라 사후 12:1에서 가나안 이주를 위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직접적인 언약이 보다 명료하게 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