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9장 성경주석
<창세기 19장 줄거리>
1. 아브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아들에 대한 약속)
7.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18. 아브람에게 준 가나안 땅
<창세기 19장 개역개정>
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2.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9.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12.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15.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8.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27.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30.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31.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3.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4. 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5. 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6.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37.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38.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창세기 19장 성경주석>
19:1 저녁 때에.
소돔성의 타락상을 바로 살필 수 있는 최적의 때이다. 왜냐하면 음란과 음ㅇ란과 방탕, 각종 사악한 죄악들이 활개치는 때는 주로 어두운 밤 시간이기 때문이다(잠7:7-9). 이런 의미에서 어두움은 성경상 죄악의 신세를 상징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을 때에도 어둠을 사랑한 유대인들은 그를 영접치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요1:4-11;19:15). 오늘날 여전히 어두움의 때에 처해 있는 우리들(눅22:53) 역시 불법과 각종 죄악의 올무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 근신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살전5:6).
19:1 두 천사.
타락한 소돔 성을 불로 심판할 목적을 띠고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된 '분노의 천사'(삼하24:16)들이다(18:22).
19:1 성문에 앉아 있다가.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재판장소, 사업 거래소, 고지(告知)장소 및 사교생활의 주요 무대였다(신21:19;수20:4;왕하7:1;느13:19;시69:12;잠1:21). 따라서 성문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붐볐는데 롯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지도층 인사로서 그곳 거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해준다.
19:1 일어나 영접하고.
숙부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한 나그네 대접 행위이다. 이러한 롯의 친절은 소돔 주민들과는 달리(4-9절) 희미하게나마 아직도 롯에게 남아 있는 경건성의 반영이다(벧후2:7-8절). 그러나 그의 결정적인 잘못은 죄악으로 가득찬 타락의 도시 소돔을 과감히 떠나지 않고 계속 그들 속에 함께 섞여 산 데 있다(살전5:22).
19:2 내 주여.
이 역시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롯도 천사들의 신분을 알지 못한 채 단순히 일반적인 존칭어를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19:2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거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호브'는 '넓은 공터', 즉 성문 안의 '광장'을 의미한다. 삿19:15에 의하면 집으로 초대받지 못한 여행자들은 이러한 성읍의 길거리에서 유숙하고는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사들이 롯의 초대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려 한 까닭은 소돔의 타락상을 구체적으로 시찰하기 위함이었다.
19:3 식탁.
식탁(*미쉬테) - '솨타'(마시다,술취하다)에서 온 말로 '마실 것', '향연'을 의미한다. 이는 여행 끝에 지친 나그네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음료수나 포도주를 대접한 것을 나타낸다.
19:4 노소를 막론하고.
이처럼 늙은이나 젊은이나 예외 없이 정염(情炎)에 사로잡혀 몰려왔다는 사실은 소돔 성읍이 만연된 도덕성의 부패를 확실히 보여 주는 동시에 그 성읍에 대한 심판의 정당성(13절)을 시사해 준다.
19:5 밤에 네게 온 사람들.
두 천사는 완전한 사람의 형태로 왔기 때문에(18:2) 그들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용모는 금방 소돔 주민들의 눈에 띠었을 것이다.
19:5 상관하리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본래 '경험을 하여 상대방을 아는 것'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성교. 즉 동성애를 가리키는 완곡어로 사용되었다(삿19:22). 남색을 가리키는 영어 'sodom y'는 소돔 주민들의 이러한 성적 문란에서 파생된 치욕스런 단어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2:24)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동성애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으며(롬1:26,27;고전6:9) 모세의 율법(레20:13)을 통해 이 죄를 엄격히 단죄하고 있다.
19:6 뒤로 문을 닫고.
손님들을 안전히 보호하기 위한 조처로 몸으로 폭도들을 맞닥뜨린 용기 있는 행동이다. 고대 동방에서는 자기집에 온 손님의 안전을 위해 목숨도 불사한 채 보호하는 것이 관례였다(8절).
롯이 손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딸들의 순결과 명예를 희생하려 한 것은 소돔 사람들의 막을 수 없는 타락 행위에 대하여 그나마 덜 심각한 죄악으로 대처하려 한 행동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는 분명 죄로써 죄를 막고자 한 세속적 타협안이었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악과의 타협은 더 큰 악을 초래하여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뿐, 하나님 앞에서의 궁극적인 해결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따라서 성도는 다른 것들에 대하여서는 자기를 희생하고 봉사해야 하지만 악에 대하여서는 추호의 양보도 없이 끝까지 대항해야 한다.
19:8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
롯의 이 두 딸은 이미 소돔인과 정혼한 상태에 있는 딸들이다(14절). 따라서 이 둘을 폭도들에게 색욕거리로 내주려 한 롯의 행위는 딸들 뿐 아니라 정혼한 사위들의 명예까지도 훼손시키는 결례였다.
19:8 내가...이끌어 내리니.
족장 시대에 있어서는 자녀에 대한 아비의 부권을 보여준다. 당시의 부권은 자식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을 만큼 막강하였는데 드라빔 사건(31:29,32), 다말 사건(38:24), 정탐꾼 사건(42:37) 등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19:9 이 자가.
욕설이 섞인 모욕적인 인사이다. 이것은 소돔 사람들이 롯에 대하여 전혀 존경심을 품지 않았다는 증거인데, 경건을 유지해야 할 신앙인이 악에 물들면 세상 사람보다 더욱 멸시 받기 마련이다.
19:9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솨파트'(재판하다, 소송을 제기하다)의 부정형으로 과거부터 공공연히 소돔 사람들의 방탕한 행위에 대해 책망과 항의를 해온 것을 가리킨다(벧후 2:7,8). 즉 비공식적이긴 하나 롯은 소돔 성으로 이주한 이래(13:12) 지도자적 위치에 있으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쳐 왔던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가 악을 멀리하지 않는 롯의 책망과 항의는 그곳 소돔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에는 힘이 미약했을 것이다.
19:10 손을 내밀어.
안에서 걸어 잠근 문을 열고서는 황급히 집으로 롯을 끌어들인 행동을 의미한다.
19:11 눈을 어둡게 하니.
왕하6:18에 나온 것과 동일한 초자연적 역사로 일시적인 시각 장애 현상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착시현상으로 인해 멀쩡한 눈을 가지고서도 엉뚱한 곳을 헤매었던 아람 군대처럼(왕하6:19,20), 소돔 거민들 역시 시각 장애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랑게(Lange)는 '천계의 신령한 능력과 지상의 마귀적 충동이 정면 충돌한 필연적 결과'였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아벤 에즈라(Aben Ezra)는 '눈과 아울러 마음까지 어둡게 되었다'고 묘사했다.
19:12 롯에게 이르되.
천사들이 롯에게 그를 방문한 목적을 일러주고 있다. 그것은 곧 롯에게 임박한 재난을 경고하는 것이자 심판이 임하기 전에 롯과 그의 가족을 그 심판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롯은 그때서야 비로소 나그네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천사들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the Codex Samaritanus).
19:12 자녀나.
이처럼 천사들이 롯의 딸들 뿐 아니라 아들들에 대하여서도 언급한 점을 들어 비평학자들은 본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문서들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천사들이 롯의 가족 구성원을 정확히 지적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언급한 것일 뿐이다. 본적에서 롯의 아내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 역시 이와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14 농담으로 여겼더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하크'는 '비웃다'(17:17), '희롱하다'(39:17)는 뜻으로, 롯의 사위들이 장인 어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그 말을 단지 조소와 건성으로만 대답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이는 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들을 줄 아는 영적 귀가 없었던 탓인데(사6:9,10) 이처럼 생명의 복음은 노아 홍수 때에도(벧후2:5), 소돔, 고모라 때에도, 그리고 말세에 고통하는 때인 오늘날에도(딤후3:1) 그것은 들을 귀 있는 자들의 것이다(계2:7,11,17,29).
19:15 재촉하여 이르되.
하늘에서는 이미 진노의 유황불이 다 준비된 상태에서, 구원에로의 간곡한 초대이다(벧후3:7). 그런데 오늘날의 상황은 이보다 더 긴박하며 이미 심판의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인 지경이니(마3:10)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아니할 때에는 아낌없이 찍히워 심판의 불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다.
19:16 롯이 지체하매.
본래 재물에 욕심이 많았던 그로서는(13:10,11)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재산을 다 놓고 간다는 것이 못내 아쉬워 머뭇거렸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던 노아(6:13-22)나 아브라함(12:1-4;22:1-12)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다시한 번 강조할 필요도 없는 만고의 진리인데, 오늘날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헛된 일에 분요하며 오직 재물 쌓기에만 급급하니(시39:6)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들의 재물을 쌓아 두어야 할 진정한 창고는 하늘에 있으며(마6:19-21), 생명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순종하는 것이 곧 참된 부요의 유일한 길(요8:51)임을 부지런히 증거해야 할 것이다.
19:16 손을 잡아 인도하여.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역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까닭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부르심(롬8:29;엡1:4)과 죄사함의 은혜(롬5:21;히10:14)때문인데 만일 이러한 은혜가 없었더라면 롯도, 우리도 모두 사단이 잡아당기는 손에 의해 죽음의 수렁으로 던져졌을 것이다(벧전5:8).
19:16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여기서 '자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원 뜻은 상대방의 행위에 상관없이 그저 베푸는 '긍휼'이나 '동정'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롯이 노아처럼(6:9) 의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여러 죄악된 요소에도 불구하고(8절) 아브라함을 기억하사(29절; 18:22-33)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19:17 돌아보거나.
없어질 세상 재물이나 명예 등 그 어떤 것에도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반드시 요구되는 원리인데, 왜냐하면 한 사람이 진정으로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듯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마6:24).
19:17 들에 머물지 말고.
멸망의 도성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라는 명령이다. 왜냐하면 죄는 전염성이 강하여 철저히 결별하지 않는 한, 한시라도 틈을 주지 않고 우리를 악에 물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교훈한다.
19:17 산으로 도망하여.
죄악의 도성과 구별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의미이다. 한편 여기서 가리키는 '산'은 사해 동편 고지대에 위치해 있는 '모압산'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Pulipit Commentary).
19:19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이처럼 롯이 이의를 제기한 까닭에 대하여선 (1)멸망의 긴박성에 따른 죽음의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높은 산을 오르기에는 역부족인 육체적 연약성 때문에 (2)소돔성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등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무튼 이는 어디를 가든지 함께 동행하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못미더워한 일종의 불신 행위인데, 이에 대해서까지 인내하시고 들어주신 것(21,2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롯에게 '인자를 더하셨다'(16절)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19:20 작기도 하오니.
소돔 다섯 성읍(14:2) 중 소알은 가장 작은 성읍이니 다른 성읍에 비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조금만 미쳐도 능히 보존되지 않겠느냐는 의미이다. 이는 물론 자신에게 베풀어진 인자(16절)에 근거한 간청이긴 하지만 (1)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산으로 피신하지 않고 처음부터 자포 자기하는 나약성을 보인 행위란 점 (2)하나님께서 제시해주신 구원의 방도(17절)에 대하여 의심하며 (19절) 순종치 않는 행위란 점에서 책망받아 마땅하다.
19:21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 소원을 들었은즉(*나사티파네카). '나사'(받아들이다)와 '파님'(얼굴)이 합쳐진 말로, 직역하면 '너의 얼굴을 가납하였은즉'이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얼굴'을 '소원'으로 의역한 까닭은 간절한 소원을 아뢸 때 대개 얼굴을 땅에 대던 히브리인들의 관습에 기인한다. 한편 롯의 소원이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천사가 이를 대뜸 수락한데 대하여선, 달리 지체할 촌음의 여유가 없을 만큼 하난미의 심판이 촉급하였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22절).
19:22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본절은 하나님의 심판 목적이 선과 악을 함께 멸하는데 있지 않고 악한 것을 멸함으로 선한 것을 보존하는데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분께선 의인의 생명 하나를 보호하시기 위해 온 천하를 멸하실지라도(6:13-22) 심판을 포기하면 하셨지 결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는 않으신다(18:25;계7:3). 그러나 여기서 다시한 번 기억할 사실은 롯이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강관적 은혜(16절)때문이었지 결코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구원받은 자가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
19:22 소알.
'작다'는 뜻이다. 본래 명칭은 '밸라'(삼키다)라는 뜻이였으나 본 사건 이후 그 이름이 바뀌었다.
19:23 해가 돋았더라.
영적으로 각성치 못한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실판의 졸지성(猝地性)을 강조해 준다. 즉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그 아침의 하늘에 심판의 불이 예비되어 있으리라고는 소돔 거민 중 그 누구도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14절). 마찬가지로 심판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역시 이와 같은 것일즉(누17:28-30), 우리는 매 순간 순간을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마24:43,44). 한 편 롯이 소돔을 떠날 때는 동이 틀 무렵이었는데(15절) 꾸물거리고서도(16절) 소알에 도착한 때가 해돋는 아침에 불과하니 그 거리가 얼마 만큼 가까운지를(20절)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일부 학자들의 견해처럼(Tertullian, Lange, Wordsworth) 심판하시기 위하여 땅에 강림하신 하나님(18:1)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 또는 성자 하나님(16:1)과 성부 하나님을 구별짓고 있는 구절로 오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는 어디까지나 심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 어법이다(Calvin). 즉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반복함으로써 강조 효과를 노리는 이러한 표현 방식은 성경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형식이다(1:27;5:1;9:16).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이를 '야훼께서 손수 하늘에서'로 번역하고 있다.
19:24 유황과...내리사.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원인이 자연적인 화산 폭발이라는 일부 학자(Lynch, Kitto)의 학설을 배격해 주는 구절이다. 설사 그같은 자연 현상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을지는 몰라도 어디까지나 두 도성의 멸망 원인과 심판의 주도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이셨음을 증거하는 구절이다.
19:25 온 들.
이 말은 '요단 평지'전역을 뜻하지 않고 그 중에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중심한 반경의 특히 기름진 지역을 가리킨다.(13:10) 이는 소돔, 고모라 멸망 이후에도 요단 평지에 위치한 몇몇 성읍이 여전히 언급되었던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왕상7:46;대하4:17).
19:25 다 엎어 멸하셨더라.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완전한 심판의 결과이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 지역은 역청이 많은 곳이었으므로(14:10) 그곳에 대한 하나님의 불심판은 자연히 지각 함몰, 침강 현상을 초래하여 오늘날 그곳은 수 표면이 지중해 수면보다 약 392km가 더 낮은 죽음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19:26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바트'는 '골똘이 바라보다'는 뜻과 함께 '마음속에 간직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Lxx, Vulgate). 따라서 이것은 롯의 아내가 단순한 호기심에 의해 뒤를 돌아본 것이 아니라, 소돔에 있는 재물에 마음을 빼앗겨 돌아본 것임을 잘 나타내준다. 게다가 그녀는 소돔 성 멸망에 대한 천사의 고지조차 못미더워하였을 것이다.
19:26 소금기둥.
문자적 뜻은 '소금으로 된 화석상' 그런데 엇비슷한 위치에 있던 롯의 일행 중 유독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만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것'(Calvin, Kalisch)은 (1)사건의 초자연적 성격과 함께 (2)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해당자에게 개별적으로 엄격히 적용된다는 사실(렘31:30)을 보여 준다. 한편 오늘날에도 사해 연변에는 롯의 아내로 전해지고 있는 특정한 소금기둥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디로 향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생히 깨우쳐 주는 산 교훈감이라 할 수 있따(눅9:62;빌3:13,14).
19:27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를 전송하러 동행했다가 멈춰서 하나님과 대화했던 곳으로 헤브론 북동쪽 언덕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중보기도 드렸던 성읍이 과연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조카 롯에 대한 염려로 인해 날이 밝는 대로 이곳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비옥한 애굽 땅과 같았던 성읍과 지경(13:10)이 마치 옹기점 연기같이 불타오르는 장면만을 목격하는 재난의 증인이 되고 말았다.
19:29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비록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긴 했지만 아브라함의 간구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 중에서도 자신의 자비(16절)와 롯의 최소한의 믿음(1-8절;벧2:7,8절) 그리고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 기도(18:23-32)에 의거하여, 롯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큰데(약5:16), 특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위해 드리는 도고에 더욱더 귀를 기울여주신다(딤전2:1-3).
19:30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여기서 산은 천사가 피신하라고 명했었던 바로 그 산, 즉 사해 동쪽에 있는 '모압산'을 가리킨다.
19:31 이 땅에는.
이 말은 멸망당한 소돔성 일대를 의미하지 결코 온 세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19:31 세상의 도리.
여기서 '도리'에 해당하는 '데레크'는 '습관', '행동 양식', '풍습'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직역하면 '온 세상의 습속'이 되는데 이는 곧 혼기에 찬 남녀가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는 '혼인 풍속'을 의미한다.
19:32 술을 마시게 하고.
여기서 술은 소알을 떠날 때 갖고 나온 것이거나(30절), 아니면 그의 두 딸이 준비하거나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9:32 이어가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야'는 '살리다', '유전케 하여 소성시키다'(시119:25)의미로 종족 보존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그 같은 인간 본능과 또한 무자로 말미암는 수치가 아무리 컸다 하더라도 아비와 상관함으로써 후사를 얻으려한 딸의 계획은 (1)인간의 기본 인륜을 저버린 패역이자 (2)후사를 핑계로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 한 간계였다는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19:35 깨닫지 못하였더라.
술이나 술을 마시는 것 자체가 죄악은 아니지만,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술취하는 것은 도덕성과 신앙이 마비될 뿐 아니라 무서운 죄를 깨닫지 못하게 되는 타락의 첩경임을 다시 한 번 단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동안 롯이 소돔 재앙과 아내를 잃은 데 대한 슬픔을 술로써 잊으려 했을 것이라고는 짐작이 가며, 일말 동정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술에 만취되어 방심함으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게 된데 대한 도덕적 책임은 면할 수 없다. 실로 노아 사건(9:20-27) 이래 술취함은 많은 죄악에로의 첩경이었다(레10:1-9;사5:11;잠20;합2:15). 만일 롯이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기본적인 덕성상(1-8절;벧후2:7,8)딸과의 근친상간이라는 무서운 죄(레20:11-17)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36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술취함으로 인한 한순간의 실수가 당대 뿐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두고 두고 롯의 생에 최대의 치욕으로 남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즉 (1)모압('아버지로 말미암아'라는 뜻)과 암몬('네 아비의 아들'이란 뜻)은 근친상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조상 롯의 수치를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 있으며 (2) 그 결과 롯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성경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신약에 얼핏 기록된(눅17:28,29,32;벧후2:7,8)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경고를 하기 위한 의미만 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