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40장 성경주석
<이사야 40장 줄거리>
1.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위로
3. 세례 요한에 대한 예고
12.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
18. 하나님과 우상의 비교
27.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긍휼
<이사야 40장 개역개정>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 성경주석>
(이사야 40:1) 위로하라...위로하라.
앞장의 내용과 비교할 때 본절의 내용은 다소 돌연적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표현 방식이 본서의 특징임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가 된다. 무대는 바벨론 포로시대로서 이제 그 시대의 종결의 임박성을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이 두 번 반복됨으로써 그 성취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피력한다.
(이사야 40:1) 내 백성.
본절 앞부분의 '너희 하나님'과 본 용어는 상호 연관성을 지닌다(렘31:33; 호1:9,10). 이 둘은 언약적 용어인데, 여기서 이 용어가 사용된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슴 아픈 사건(특히, 바벨론 포로 사건)에도 불구하고 과거 이스라엘의 선조들과 맺었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파기되지 않았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Fausset, Whybray).
(이사야 40:2)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어 원문은 '키 나르차 아오나'이다. 여기서 '니르차'의 원형은 '라차'로서 '죄값을 지불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위로의 메시지의 핵심은 죄값이 지불되었다는 것, 죄가 사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망했고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하는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죄사함의 근거가 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심판도 궁극적 의미의 심판은 아니었다. 궁극적 심판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 다만 이스라엘은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적 신실성으로 말미암아 본문과 같은 약속을 받게 되었을 따름이다.
(이사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히브리어 원문 '콜 코레'는 서술적 용법('한 음성이 외친다'), 형용적 용법('외치는 음성'), 명사적 용법('외치는 자의 음성')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본 구절을 인용한 마 3:3과 본서에서의 용례를 고려할 때 명사적 용법의 번역이 좋다. 그렇다면 '외치는 자'가 누구이냐라는 문제가 생기는데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6:4에 근거할 때 천상적 존재, 곧 천사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이사야 40:3)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여기 '사막'을 단지 바벨론과 팔레스틴 사이에 있는 지리상의 광야로만 생각함으로써 본 구절을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한 언급으로 국한시킨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본서가 지향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너무 축소시킨 견해이다. 가깝게는 2절에서 분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암시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본문은 우주적 구원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막'은 죽음의 땅, 심판의 땅이며 그 같은 땅에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9:1-7).
이사야 40:4 본절은 동방의 군주들이 여행에 앞서 선발대를 보내어 골짜기에 길을 만들고 언덕을 평평하게 함으로써 여행의 장애를 주는 요소들을 제거하던 관행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본절은 침례 요한에게 적용될 수 있는데 침례 요한의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에서 떠난 것, 자기 확신, 민족적 특권에 대한 자만심, 위선, 그리고 비종교성을 제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꺼이 준비케 하는 일이었다(말4:6; 눅1:17).
(이사야 40:5)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여기 '모든 육체'란 인간의 본성 혹은 일반적인 의미의 인류를 가리키는데(창6:12;시145:21). 본절에서는 후자가 옳다. 한편 '보리라'에 해당하는 '라우'는 '몸소 체험하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출애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익숙했던 여호와의 현현보다는 (6:3;출33:18-23) 성육신하신 하나님 곧 예수 오심을 암시한다. 신약은 이 사실을 이렇게 묘사한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이사야 40:6)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여기 '아름다움'은 '하스도'인데 그 원형은 '헤세드'이다. 이 말이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 견해가 있는데 그 하나는 인간 관계에서 당연히 요구되는 예의이며(Gleek), 또 다른 하나는 친절 긍휼이 여김이다. 야보고와 베드로는 둘 다 이것을 '돝사' 곧 '영광'으로 번역하였는데(약1:10,11; 벧전1:24,25) 이 영광이란 어떤 사람을 아름답게, 힘있어 보이게 하는 건강, 기력, 미, 재능, 지혜 등을 뜻한다(Barnes). 인간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예법, 그것을 지나서 상대방에게 친절, 선을 베푸는 것, 그리고 건강미, 지혜 따위가 들의 꽃과 같이 마르고 시들 것이라고 본문은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인간의 모든 자랑거리와 아름다움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함을 뜻한다.
이사야 40:7 본절의 이미지는 사막의 열풍(sirocco)이 불어올 때 봄에 피어난 꽃들이 갑작스럽게 시들어버리는 현상에서 취해졌다(Whybray).
(이사야 40:8)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본문의 의미는 말씀의 영원성과 불변성 뿐 아니라 유효성, 곧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 까지 포함하고 있다. '서리라'로 번역된 '야쿰'이 바로 '유효성'의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용어이다.
(이사야 40:9) 높은 산에 오르라.
이는 적군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파수대 따위와 같은 높은 곳에 머물렀던 파수꾼이나(52:8) 자기 부대의 도착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앞서 파송되어 높은 지대로 오르곤 했던 전령(삼상31:9;삼하18:19-21)의 모습에서 착안한 표현이다. 한편, 높은 산에 올라 전할 '아름다운 소식'이란 1차적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 소식이며, 더 나아가서는 성육신하여 오실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
(이사야 40:10) 상급...보응.
전자는 '쉐카로', 후자는 '페울라토'인데 이 용어들은 전투의 승리자가 본국으로 귀환할 때 가져갔던 노획물 혹은 공물 따위를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강한 능력을 동반하고 오실텐데 그때에는 여호와를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흑암의 세력들이 패퇴당할 것이다.
이사야 40:11 본절은 그 내용상 앞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하나님이 강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얻은 대가는 새끼 밴 암양과 양떼 곧 새롭게 회복된 백성이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는 성도의 목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게 한다(요10:11-15).
(이사야 40:12) 손바닥...뼘...되...저울...막대저울.
이들은 모두 당시의 측량 도구를 가리키는데, 본절에서 이것들을 가지고 달고 재어보는 대상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다. 당시보다 오늘날은 측량 도구가 발달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것이든 오늘날의 것이든 간에 그것들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이 위대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이사야 40:13)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모사'란 '이쉬 아차토'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그의 조언의 사람'이다. 본문은 당시 군왕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정치 전문가들에 의존하였던 사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절은 하나님을 조언할 책략가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과 초월성을 가르친다.
이사야 40:14 하나님의 피조 세계조차 헤아릴 자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에 통달하고 하나님을 유일 무이성, 초월성 및 무한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세상 존재와 구별되는 거룩하신 분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조차 헤아릴 자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에 통달하고 하나님을 유일무이성, 초월성 및 무한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세상 존재와 구별되는 거룩하신 분임을 밝히고 있다.
(이사야 40:15) 저울의 작은 티끌.
원문 직역은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이다. 본절은 물동이의 물 한 방울, 저울 위에 살짝 놓인 먼지 등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여 눈에 보이는 가시적 물리 집단인 당시의 국가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 40:16 표면상으로 본절은, 하나님이 비교할 상대가 없는 위대한 분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핵심적인 의미는, 그 유명한 레바논의 울창한 삼림이나 짐승들로도 그분께 합당한 제사를 드리기에는 오히려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땔깜용 나무와 희생 제사용 짐승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과 그 이웃 나라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틴이 가장 울창한 삼림과 가장 풍성한 동물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이사야 40:17) 아무것도 아니라...없는 것... 빈 것.
이에 해당하는 세 히브리어 '아인' '메에페스', '토후'는 우상과 관련한 묘사에서 자주 언급된다(41:24,29; 44:9-11; 46:1,2). 물론 여기서는 제 힘만 믿고 제국주의적 야심에 불탔던 열방들에 대한 풍자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주권 앞에서 그들의 존재란 무기력하고 미미하기 짝이 없다는 점에서 허탄하고 허무한 우상(18절 이하 참조)에 비교될 수 있겠다(Watts).
이사야 40:18 인간이 가진 특징 중에 하나는 경험한 세계를 토대로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상상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유용하다. 그러나 그 같은 기능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피조 세계에 보이는 어떤 사물이나 인간을 연관시키는 목적에 사용할 때는 우상 숭배라고 하는 극악한 죄에 빠지게 되는데 바로 이 점을 본절은 지적하고 있다.
이사야 40:19 본절은, 우상이 인간의 고인물임을 밝히고 있다. 앞부분에서(17절) 열국을 말하고 나란히 우상을 말하는 까닭은 고대 세계에서 한 나라와 우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을 단지 당사국간의 싸움이 아니라 나라마다 섬기던 신들 간의 싸움으로 믿었다. 따라서 싸움 후 진 편의 신은 없어지든지 이긴 편의 신에게 종속적 존재가 되곤 하였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당시 이방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바벨론의 말둑(Marduk) 신에 의한 하나님의 패배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18절에서부터 저자는 우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물건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패배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라 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사야 40:20)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우상을 세운 사람이 그 마음대로 옮기거나 고정시킬 수 있음을 암시함을 통해 하나님만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분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사야 40:21 본절은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기 위해 질문하는 교사를 연상케 한다. 이스라엘은 어려서부터 만물의 기원을 배웠다. 저자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와 초월해 계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해 의문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사야 40:22) 메뚜기 같으니라.
땅과 하늘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람이 지극히 자그마하게 보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문맥상 하나님과 비교조차 되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과 미미함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이사야 40:23) 귀인들을...헛되게 하시나니.
인간의 눈에 방백이나 재판관들은 힘있는 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무력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권세를 주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언제든지 그 권세를 폐하는 분도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40:24 37:31과 뚜렷이 대조되는 구절이다. 견고하게 뿌리내려 과실을 맺는 의인과는 반대로 악인은 열매는 커녕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는 식물에 비유되고 있다.
(이사야 40:25) 동등하게 하겠느냐.
37:31과 뚜렷이 대조되는 구절이다. 견고하게 뿌리내려 과실을 맺는 의인과는 반대로, 악인은 열매는 커녕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는 식물에 비유되고 있다.
(이사야 40:26) 눈을 높이 들어...창조하였나 보라.
이에 해당하는 '에쉬에'는 문자적으로 '내가 같아지겠느냐'는 뜻이다. 하나님의 유일 무이성이 이번엔 하나님 자신의 말로써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하에서는 이러한 강조의 근거가 이어지고 있다.
이사야 40:27 본절에서는 야곱, 곧 이스라엘이 자신은 정당한데 그 정당한 사정이 하나님께 외면당하고 있다고 원망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우리는 26절에까지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절대성, 초월성, 무한성, 무비성(無比性)이 강조된 것을 보아왔는데 본절부터 31절까지에서 그 강조한 바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사야 40:28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정이 외면당했다고 생각하여 절망, 좌절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영원하신 분, 땅 끝까지 창좋사신 분 그리고 한 번 시작한 일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일관성 있는 분, 신실한 분, 아무도 깨달을 수 없는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분임을 선포하신다.
이사야 40:29 계속해서 본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긍휼에 풍성하신 분임을 첨가하고 계신데, 영원, 무한, 신실, 전지하신 분이 힘없고 능력없는 자에게 힘주신다는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든다.
(이사야 40:30)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장정'에 해당하는 '바후림'의 문자적인 뜻은 '선발된자'인데 이들은 긴박한 사업, 위험한 일 등을 수행하기 위하여 피택된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들이 특별히 뽑힌 장정들이라고 할지라도 질병이나 피로, 사고 등에 의하여 그 힘이 쇠약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을 바랄 수 밖에 없는 의존적 존재이므로,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해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강한 권고의 말씀이다. 본서 1장은 이스라엘의 당면된 현실을 바라보면 소망이 없음을 강변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으로 인한 소망과 가능성을 조금씩 비치기 시작하는데 그 절정은 53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