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BIBLE/이사야

이사야52장 성경주석

홍페이지 2022. 7. 1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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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2장 줄거리>

1. 예루살렘을 격려하시는 하나님

7. 구원의 복된 소식

13. 하나님의 종의 탁월함

 

<이사야 52장 개역개정>

1.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2. 너는 티끌을 털어 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4.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전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에 거류하였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5. 그러므로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6.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8.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11.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12.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13.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이사야 52장 성경주석>

(이사야 52:1) 네 힘을 낼지어다.

 문자적인 의미를 중시하면 좌절, 낙담에서 벗어나서 여호와의 능력에 의지함으로써 강하고 담대하라는 뜻이다(40:28-31; 51:9; 삿6:12-16; 시84:5,7).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의 평행구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Fausset). 예루살렘은 여기에서처럼 흔히 여성에 비유된다.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는 것은 문맥상 포로 및 고통과 대조를 이루는 독립 및 기쁨, 번영의 미래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이사야 52:1) 이제부터...것임이라.

 여기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란 문맥상 이스라엘을 침입하는 이방 군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도 두 차례 정도 큰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 따라서 본 예언은 그 완전한 성취 시점을 먼 미래로 잡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Leupold). 먼 훗날 곧 메시야의 완전한 통치를 받게 되는 날, 이스라엘 곧 교회는 부정하고 불의한 세력의 통치없이 완전한 성결을 이루며 살게 될 것이다.

(이사야 52:2) 일어나 앉을지어다.

 문자적인 뜻은 '앉으라'이다. 문맥적으로 볼 때 이것은 마치 일어섰던 곳, 곧 티끌에 다시 앉으라는 뜻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용어는 영예로운 진리, 왕의 자리 등에 앉기를 권할 때 주로 사용된다. 여기서 우리는 포로 귀환할 이스라엘이 포로 해방이라는 차원을 넘어 무너진 왕조를 다시 회복할 것까지 내다보게 된다. 물론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은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되어질 것이다(9:1-7).

(이사야 52:3) 값 없이...속량되리라.

 이스라엘이 값을 받지도 못한 채 포로가 되고 죄수가 되었으니 이제 값을 치르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되겠다는 말씀이다. 값을 치렀든 안치렀든지 간에 일단 포로나 노예의 소유주가 된 자는 일정한 값을 받지 않고는 절대 그들이 놓아주지 않기 마련이다. 이스라엘의 소유주인 바벨론은 이스라엘 포로에 대한 그 같은 태도를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으 자유의 몸으로 만드실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시대 교회 역시 '죄 아래 팔린 자'이다(롬7:14). 그러나 이들 역시 값 없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55:1). 말하자면 육신을 쓰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행위에 관계없이 죄인이지만 값없이 베푸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 52:4 본절은 앞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볼 때 포로 이스라엘이 값없이 자유의 몸이 될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그 유사한 예들을 증거로 제시하는 내용으로 보면 되겠다. 먼저 과거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애굽 땅으로 내려갔었는데 그 후손들은 값을 받지도 못한 채 애굽의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애굽한 바 있다. 또한 이스라엘은 디글랏 빌레셀, 살만에셀, 산헤립 등으로 대변되는 앗수르의 군대에게 수차례 공격받고 포로로 잡혀간 바 있었는데,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마치 이스라엘의 소유주인 양 행사하다가 파멸당하고 말았따. 이 같은 과거의 예들을 근거로 할 때 이스라엘이 비록 값없이 팔려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사야 52:5)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하랴.

 문자적인 뜻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로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내놓는 탄식 같지만, 문맥상 하나님의 강력한 개입을 압시하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다. 과거처럼 이스라엘이 값없이 포롤 잡혀갔으니 이스라엘의 주인되신 하나님이 강력히 개입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사야 52:5)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여기서 '떠들며'는 자랑한다는 뜻인데, '슬픔의 비명을 지른다'는 뜻도 있기 때문에 바벨론의 포악한 통치 및 압제자들의 폭정으로 인한 이스라엘 포로들의 '비명소리'를 의미한다 할 수 있겠다(70인역). 두 경우의 어느 것이 옳든 간에 이것은 하나님이 강력히 개입하시는 이유가 된다.

(이사야 52:5) 내 이름을 항상 종일토록 더럽히도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는 뜻인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비웃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속하시는 근본적 이유는 그들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당신의 주권적 계획과 그의 거룩하신 이름의 영예 때문이다(겔20:9,14).

(이사야 52:6)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1-5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 계획의 중요한 이유가 밝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앞 문맥에서 밝힌 예언을 그대로 성취시킴으로써 당신의 영화로운 권능과 주권을 밝히 드러내고자 하신다.

이사야 52:7 온 성안 백성이 고대하고 원하였던 소식을 소지하고 달려오는 전령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눈에 비친 전령의 발이야말로 아름답게 보였음에 틀림없다. 물론 그 소식이란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회복의 소식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암시라고도 볼 수 있겠다(롬10:15).

(이사야 52:8)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파수꾼들이 한 목소리로 기쁨의 노래를 부를 첫 번째 이유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돌아오심이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포로 구환민들과 함께 다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일순간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 묘사는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에 대한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이사야 52:8) 눈이 마주 보리로다.

 '눈이 눈을 보기 때문이다'란 뜻이다. 민 14:14에서도 등장하는데, 그곳에서는 '대면하여 보다'로 번역하고 있다. 어떤 베일이나 중간 매개자 없이 가까이서, 공개적으로 또 명백히 보게 되는 사실을 드러낼 때 이 표현이 사용된다.

(이사야 52:9) 구속하셨음이라.

 여기 '구속'은 1차적으로는 하나님이 행하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그 구원이 암시하는 바, 메시야를 통한 온 인류의 구원까지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구속의 결과를 서술하고있는 10절에 의하면 온 세상 백성이 그 구속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2:10)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전투를 위해 자신의 튼튼한 팔을 과시해 보이는 용사로부터 취한 이미지이다(겔4:7).

(이사야 52:10) 땅 끝까지도...구원을 보았도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모든 민족들이 여호와를 인정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66:18-20).

(이사야 52:11)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우상을 좋아하는 이방의 습성에서 벗어나 자신들을 성결케 보존하라는 것이다. 야곱은 세겜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올라가기에 앞서 그 모든 우상, 신상 따위를 처분하라는 비자령을 받은 바 있다(창35:1-5).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준비 조치는 세상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성도에게 세상으로부터 나와 그 모든 영향력으로부터 단절될 것을 명령할 때 본 구절을 인용한 바 있고(고후6:17,18), 요한도 그리스도인이 '큰 성 바벨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그 죄의 동참자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을 명령할 때 본절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계18:2,4).

(이사야 52:11)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할지어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포로를 잡혀갈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성전의 모든 기구들을 함께 운반해 갔고 그것을 자신들의 축제 때 사용했던 사실과(단5:2-5), 고레스의 명령으로 본국 귀환시 그 기구들도 같이 옮겨 갔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스1:7-11). 성전의 일을 맡아 보는 제사장과 레위 족속(민1:50;4:15)은, 일반 백성 그 이상으로 자신들을 성결하고 거룩되이 구별해야 했다.

(이사야 52:12)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황급히 나와야 했던 출애굽 때와는 대비를 이루는 상황이 제시된다(출12:33,39; 신16:3).

(이사야 52:13) 보라.

 저자는 본서 곳곳에서 주의를 새롭게 환기시킬 목적이 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무려 70여 회나 된다. 이제 저자가 새롭게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려고 하는 대상은 40장 이후에 계속 나온 '여호와의 종'이다.

(이사야 52:13)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본 하반절에서 진술된 것에 의해서 나타나는 결과를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본 하반절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동사의 의미를 통해 잘 드러난다. 첫 번째 동사는 '야룸'인데 이것은 '그가 일어날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두 번째 동사는 '니사'로서 '그가 자신을 일으킬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마지막 동사는 '가바'로서 하나의 상태를 나타내므로 '그가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로 번역된다. 주목할 점은 이 세 동사가 모두 승귀의 최고 정점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신약 성경을 삽입하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본서 저자와 빌립보서 저자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할 때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분의 승귀라는 위대한 주제를 진술할 수 있었다.

(이사야 52:14) ...놀랐거니와.

 여기 '놀랐다'는 선지자 에스겔이 두로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된 '숌무'인데, 에스겔은 섬들의 거민들이 한 때 교만하던 두로가 엄청난 하나님의 응징을 받은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질리는 것을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본 동사를 사용한 바 있다(겔27:35). 본절에서도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본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질리듯 놀란 것은 종의 모습이 너무 상하여서 사람의 모습 같지 않을 정도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두로처럼 그 종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 없다.

(이사야 52:15)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놀라게 할 것이며'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해당하는 '예제'를 어떤 학자들은 '기뻐 뛰게 할 것이다', '경배할 것이다' 등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전에 팔레스틴에서 발견된 매우 오래된 본서 사본에 따르면, 본 동사는 '뿌릴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sprinkle, KJV, NIV). 이 번역은 맛소라 본문의 직역과 동일하다. 더 나아가 뿌린다는 것은 레4:6; 8:11; 14:7 등에 나오는 것처럼 결례 집행을 암시한다. 결례를 집행하기 위해 뿌리던 자는 제사장이었다. 그렇다면 본서의 '종'의 사역 역시 제사장의 사역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부사 '후에는'과 연결시켜 보면 그 '종'은 그토록 무섭게 상해 있는 동안 바로 이 결례를 집행하신다는 뜻이 된다. 많은 무리에게 전적으로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 바로 그 분이 오히려 대제사장으로서 물과 피를 뿌릴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열방을 정결케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그 분은 너무도 고난을 많이 당하신 수난자로서 그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고난들은 속죄적 정결을 위한 것이다.

(이사야 52:15) 입을 봉하리니.

 이 표현은 어떤 소식에 압도되어버린 상태를 나타낼 때 처한 것은 수난과 종의 사역이 성공적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형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 예언을 복음 자체에다 다음과 같이 적용시키고 있다 :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본절을 포함한 13,14절은 53장에서 전개될 위대한 주제의 요약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