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BIBLE/로마서

로마서3장 성경주석

홍페이지 2022. 9. 3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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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줄거리>

1. 유대인의 특권에 대하여

9.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19. 율법과 복음

 

<로마서 3장 개역개정>

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장 성경주석>

(로마서 3:1)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지금까지 할례의 무효성과 표면적인 유대인에 대해 공격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바울은 이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비록 불법과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하지 못한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바 축복은 일단 인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의 사도가 도리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유대인의 우선 순위 내지 우월성에 대해 언급한다. 즉 바울 자신이 말씀을 먼저 받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적으로 본절과 2절에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나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페릿손'은 '넘치는', '남아도는', '두드러진', '필요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가 정관사 '토'와 함께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쓸모없이 남아도는 여분'을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고(고후9:1), 부사적 용법으로서 '과도하게 풍부하다'는 의미로도(고후10:8) 쓰였다. 본절에서는 의문대명사 '티'와 함께 사용되어 유대인이 가진 '탁월성' 또는 '우월성'(superiority)을 의미한다.

(로마서 3:2) 범사에 많으니.

 '많다'(*폴뤼)라는 말은 1절의 '토 페릿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에게 유익이 많았다는 의미는 바울이 밝힌 바와 같이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9:4)이 주어졌다는 표면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와 규례 아래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2:25). 바울이 이와 같이 유익을 인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31절).

(로마서 3:2) 우선은.

 '우선은'으로 번역된 '프로톤 멘' 뒤에는 당연히 '둘째', '셋째' 등의 서수가 기대되지만 바울은 '우선은' 외에 더 이상의 논리를 전개시키지 않는다(1:8). 본절에서는 문맥상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순서상 앞선다는 의미로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받았따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Robertson), (2)그 중요도나 비중에 있어서 먼저라는 의미로서 유대인에게 가장 첫째되는 유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Bruce). 문맥상 (2)의 견해가 타당하다.

(로마서 3:2)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9:4,5에서 바울은 보다 자세하게 유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즉 '언약들과 율법', '예배와 약속들'이 그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증명되고 해석된 '언약'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블랙(Black)은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아'를 '예언적인 말씀'(Oracles)으로 번역하여 주로 '구약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구약성경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9:4,5를 근거로 '말씀'을 '구약성경'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한다(Matthew Henry, Greijdanus, Hendriksen, Murray, Lenski, Barmby).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음으로써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아는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 점에 대해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맡았음이니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전승시키고 가르치며 전파하는 등, '말씀'과 관련된 사역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로마서 3:3) 어떤 자들이.

 유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있으므로 바울은 '유대인'이라 총칭하지않고 부분적인 의미의 부정 대명사를 사용했다. 어찌하리요(*티 가르에이). 빌1:18에 기록된 '그러면 무엇이뇨'(*티 가르)와 같은 감탄조의 어투이기도 하지만 본장에서는 이어지는 두 가지의 질문 형식과(5,8절)같이 부정의 대답을 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특권 속에서 무한한 것을 기대하며 착각하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용법은 바울이 흔히 사용하는 논쟁적인 문체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서 유대교 랍비들의 논쟁법을 인용한 수사법(修辭法)이라고 할 수 있다(E.Kasemann).

(로마서 3:3) 믿지 아니하였으면...그 믿지 아니함이.

 본 구절은 해석상 여러 견해가 있다. 본절에 사용된 동사 '에피스테산'과 명사 '에피스티아'가 개역성경처럼 '불신앙'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성실함이나 믿음의 부족'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혹자는 이 두가지 의미를 다 포함한다고 주장하지만(Greijdanus) 본질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합쳐질 수 없다. 영역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불신앙', 이 의미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배척했다는 어감이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로 신앙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Alford, Bultmann, Hodge, Lenski, Hendriksen, Ridderbos, Harrison, Bruce, RSV, NEB, Moffat, JB). (2)'믿음의 결여'. 이 해석은 하나님을 배척했다는 의미보다 '적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믿음'에 있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고, 믿음의 강도가 어느 정도 약하다는 의미가 강하다(Cranfield, Greijdanus, Sanday, KJV, NASB, NIV). 따라서 이 해석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해석이 된다. 그러나 히3:12에서 언급된 '아피스티아'는 분명히 '불신앙'을 나타내며, 딤후 2:13에서도 하나님의 '미쁘심'과 인간의 '미쁨 없음'을 대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본절도 그러한 형식을 취해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4:20의 경우와 같이 해석하기 애매한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들은 '믿음의 결여'라기 보다는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가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고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것이지 '믿음의 결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는 히4:3에서 '불신앙'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도 약속에서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불신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서 3:3)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백성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의 불신앙에 기인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불성실하거나 불신앙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취소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적은 있다(신8:18-20; 삿2:19-21). 그렇지만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것들 특히 메시야 예언 등이 무효화될 수는 없다.

(로마서 3:4) 그럴 수 없느니라.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게노이토'는 히브리어 '할릴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70인역(LXX)도 '할릴라'를 '메게노이토'로 번역하고 있다(창44:7;신24:16;왕상21:3). 이 말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로마서 3:4) 사람은 다 거짓되되.

 '모든 사람이 거짓되다'는 것은 시116:11의 인용구로서 인간의 불의함, 신실치 못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내용과도 부합된다.

(로마서 3:4)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3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다 강력하게 하나님의 미쁘심을 설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참'(*알레데스)되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알레데스'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로기아), '미쁘심'(*피스티스), '의'(*디카이오스)와 함께 연결되어 서로 보충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 인간이 가진 불신앙과 거짓과 불의는 참되신 하나님을 자기의 소욕에 따라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죄악된 생각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참'(*알레데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약속은 일관성이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J. Murray). 이처럼 변하지 않는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사람의 믿음이나 진실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동일하다(시100:5).

(로마서 3:4) 주의 말씀에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본 구절은 시51:4(LXX 시50:6)의 인용으로, 천상의 법정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시편 저자 자신의 죄와 무법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는 죄에 대한 고백을 반복적으로 하는데(LXX 시50:4,5,7,11), 이러한 표현은 시편에 그리 흔하지 않은 독특한 용법이다. 아마 유대적 관점에서 무법(lawlessness)과 불신앙(faithlessness)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것 같다(Dunn). 바울은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천상 법정의 공의로움이 사람의 죄악을 드러내기에 충분하고, 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사람의 상대적인 믿음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미쁘심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3절)을 설득력있게 말한다. 요컨대 이 인용은 인간의 불의함과 거짓됨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참되심에 대조시키기 위한 것이다.

(로마서 3:4) 판단 받으실 때에.

 '판단 받으실 때'에 해당하는 시51:4의 히브리 본문이 개역성경에는 능동형인 '판단하실 때'로 번역되어 있으나 70인역(LXX)에는 바울의 인용대로 수동태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판단받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는 수동형이든 능동형이든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 판단받는다는 의미로 다윗이 고백하거나 바울이 인용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즉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의도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으나 그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심을 나타내는데 있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해서 아무리 판단해 보아도 하나님의 순전(純全)하심에는 손상을 가할 수 없다. 따라서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논하든지 하나님께서 그 죄인된 인간을 판단하시든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순전하심에 한치의 도전도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결코 왜곡되지 않고 의롭기 때문에 '이기려 하심이라'는 표현이나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4)란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로마서 3:4) 이기려 하심이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세이스'를 제외한 본절 전체가 70인역의 번역과 똑같다. '이기다'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A,D)에서는 미래형 '니케세이스'로 되어 있고 70인역(시50:6)과 몇몇 사본들(B,G,L)에서는 단순과거 가정법 동사인 '니케세스'로 되어 있다. 바울이 자신의 의도대로 시편의 내용을 인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종말의 심판과 사람의 죄를 연관지어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미래형으로 쓴 것 같다.

로마서 3:5 본절에서 바울은 앞절(4절)에서 인용한 시 51:4에 대해 유대인들이 오해할 것을 염려해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바울은 단지 자기 교훈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지, 오해나 잘못된 추론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Hodge). 그러나 바울은 8절에서 단순한 유대인의 반대가 아니라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바울의 진술에 대한 오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신실하게 언약을 맺어오셨던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은 공정한 처사가 될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거나 약속을 저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질느 죄악에 대해 공의의 판단으로 징계하시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로마서 3:5)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지금 바울은 5:20에서와 같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는 의미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불의는 결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빛나게 할 수 ㅇ벗다. 오히려 인간의 불의를 의로우신 판단으로 징계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더욱더 드러나게 된다.

(로마서 3:5)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언약들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은 아니다(3절). 문제는 유대인의 불신앙과 불의며, 하나님은 그에 대해 공의로운 판단을 내리셨을 따름이다.

(로마서 3: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4절과 마찬가지로 '메 게노이토'이다(4절 주석 참조).

(로마서 3:6)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신다면,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므로 이러한 '절대 의'로 인해 발생하는 진노는 정당성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심판자의 개념을 사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법률에 적용되는 소송을 심리(審理)함으로써 공정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공직자로서 법정 안에서만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족장 시대에는 가장이 가정의 재판관이었으며(창21장), 왕정 시대에는 왕이 최고의 재판관이었다(삼하15:2,3). 때로 제사장들도 재판관 노릇을 하였으므로 성소가 재판장소가 되기도 하였다(출33:8;신17:12). 그 외에 성읍의 장로들도 재판관의 임무를 감당했으나(삿8:6;룻4:2)사람에 관한 판결을 선언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심판자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었다(창18:25;사33:22;약4:12).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판단하시는 분'(시94:2),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는 분'이다(사2:4). 그러나 죄인은 언제나 공평한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려고 하였다(시7:8;50:4,5;히10:30). 신약에서는 '심판'이 '크리노', '크리마', '크리시스' 등의 단어로 나타나는데, '조사한 후 판결하다' 또는 '분별'이나 '결정' 등의 의미로 쓰였다. 구약의 심판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규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새로운 권위에 의하여 판단하는(요8:16;약5:9;벧전4:5) 종말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여졌다(고전6:2,3; 딤후4:1). 따라서 본절에 쓰인 '심판'(*크리네이)의 개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룩된 신성한 도덕적 질서, 다시 말해서 율법적인 기준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판단받는 것을 의미한다(24-26). 후자의 조건을 갖춘 자는 전자의 조건과 관계없이 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것이지만(8: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전자의 판단 기준 곧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갈6:7) 육체의 법을 따라 정죄받으며 육체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종의 자리에서 율법에 의하여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2:12; 갈2:16).

(로마서 3:7) 그러나.

 이 접속사에 대해 몇몇 헬라어 사본들(B, D, G, K, P)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때문이다')를 사용하고 있다. 개역성경과 같이 역접 '그러나'(*데)를 취할 경우(*A), 형식상으로는 앞 구절(6절)에서 언급한 것을 반대하는 구문이 된다. 그러나 본절은 6절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상으로나 문장 구조상 5절과 연결된다. 즉 5절과 본절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6절은 삽입구로 볼 수 있다. 그럴 경우에 본절은 5절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한 진술로 서로의 내용을 보충한다. 이와 반대로 '가르'라는 이유 접속사를 사용할 경우 본절과 8절은 의미상 5절이나 6절 그 어느 절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가르'는 어떤 판단의 진술 후 그 진술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절을 이끄는 데 적합한 접속하이다. 따라서 '가르'가 본절에 사용될 경우에는 앞 구절과 연결되어 5절의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절을 이끌지 못한다. 그러므로 '데'가 더 적합한 접속사로 보인다.

(로마서 3:7) 나의 거짓말로...그의 영광이 되었다면...심판을 받으리요.

 이 말은 '나의 거짓과 불의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은 죄인 취급되어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의미를 지닌 궤변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8절 후반부에서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한편 본문만을 따로 떼어내어 '심판을 받으리요'라는 반문을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우리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황 윤리가 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로마서 3:8)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나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결코 죄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결과는 본절과 같이 보다 적극적인 궤변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부모님에 대한 공양의 책임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무시해 버린 바 있다(막7:11). 바울도 예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종교적인 열심으로 선을 이루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 악을 행한 적이 있다(행8:3;9:4). 비록 바울이 그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태도가 변하여, 오히려 유대인이 바울의 과거에 범했던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바울은 간파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시각에는 바울의 주장이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과 같이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들의 소행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 아래 매여 율법의 종된 자들은 그들의 울타리 속에서 믿음을 판단하려 하지만, 거짓 판단으로 선을 이루려는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악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로마서 3:8)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판단의 근거는 7잘과 8절의 반문식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와 불법이 공존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벧리알이 도무지 조화될 수 없음에도(고후6:14,15) 그것이 간으한 것처럼 합리화하려는 자들이나 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바울은 본 구절로써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실 바울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바울의 교훈을 곡해(曲解)하여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바울의 논술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줄 수 있었다.

(로마서 3:9) 우리는 나으냐

 본 구절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지칭하는 바가 누구인지 규명해야 한다. (1)유대인을 통칭했다고 볼 수 있는데,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기에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다음 근거를 볼 때 이 견해는 옳지 않다. 본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역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을 가리킬 때 보통 3인칭으로 나타냈으며(1절; 1:16;2:9;9:4;10:1;11:20), 2:1-29에서는 유대인이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었다. (2)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8절에서 사용된 '우리'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부터 18절까지는 죄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이므로 그리스도인도 그 죄의 보편성에서 제외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란 바울 자신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또는 더 넓게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한편 '나으뇨'에 대한 해석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헬라어 '프로에코메다'의 번역인데, 이 동사가 수동태와 중간태의 형태가 같고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동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우리는 나아지는가'로 해석되어 '우리는 나은 자로 판단받을 수 있는가?라는 의미를 지닌다(Meyer). 그리고 중간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개역성경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능동의 의미이든 수동의 의미이든 간에 '우리는 나은 것이 없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수동태를 취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현 실존이 죄의 보편성 문제에 있어서 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 강조되지만, 중간태를 취하면 유대인과 비교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물음이 강조된다.

(로마서 3:9) 결코 아니라

 '우 판토스'는 고전 5:10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단순한 부정 이상의 '결단코 그럴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어야 한다. 혹자들은 1,2절에 기록된 유대인의 유익이 범사에 많다는 진술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2절에서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유대인이 갖는 특이한 지위와 역할을 다루었고, 여기서는 유대인의 도덕적, 영적 상태를 언급하여,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Harrison). 더욱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영적 윤리적 상태에 있어서는 별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앞 구절의 질문에 대한 본 구절의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판토스'는 보다 강한 부정을 나타낼 수 있도록 부정어 '우'의 위치를 바꾸어서 '판토스 우크'(*고전16:12)를 취해야 한다(Murray). 따라서 '어느 모로봐도 아니다', '터럭 만큼도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의 의미이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바울은 이제까지의 논증을 '기록'에 의존하여 결론짓고 있는데, 이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구전된 전승들(oral traditions)이라고 한정짓기도 하지만 본절에서 언급하는 '기록된 바'는 선교상의 변증과 논증을 목적으로 확실하게 제시되었던 자료들로 보여진다. 시가서를 비롯한 구약성경들이 초대 기독교에 수납되었다는 사실은 쿰란 문서들(DSS)을 통해 입증되었다(Kasemann). 바울은 여기서 시편을 주로 인용하였는데, 12절은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시14:3; 53:3), 10절과 11절은 약간씩 변형하여 바울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강조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인용한 시편들과 본문을 대조하여 보기로 하자.

 

(로마서 3:10) 의인은 없나니

 문자적으로 시14:1보다 전 7:20(LXX)에 더 가까운데, '세상에 아주'(엔테게) 없다는 것을 '하나도'(*우데 헤이스)없다고 표현한 점만 다르다. 시편과 비교해 보면, '선을 행하는 자'(*포이온 크레스토테타, 시13:1<LXX>, '포이온 아가돈, 시 52:2>)라는 표현 대신 '의인'(*디카이오스)이라고 변형시켰고, 시편에 언급되지 않은 '하나도'없다는 표현을 첨가하여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바울은 이러한 표현 방식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한편 '의인'에 대해 혹자는 '올바른 도덕관을 갖고 그 원리에 따르는 자'도 포함시키고 있으나(Matthew Henry), 타당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도덕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구약에서의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창5:24, 6:8). 결국 죄에 오염된 인류는 본질적으로 '선'이나 '의'라는 개념과 거리가 멀다.

(로마서 3:10) 하나도 없으며

 헬라어 '우데 헤이스'는 예외는 아무도 없다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바울의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몇몇 경건한 자들을 의로운 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빌3:6).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의'의 개념 조차도 하나님의 본성에서 떠난 도덕적 규범 속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유대 묵시 문학 속에서도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면 의로운 자가 없다'라는 표현이나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라는 구절은 신약에 기록된 바울의 견해와 일치한다(Kasemann).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주장이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전에 알았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버렸고(빌3:8)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초대 교회 속에서 사용된 보다 권위있는 구약의 문서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3:11) 깨닫는 자도 없고

본절은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는 피상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여 체득한 직접적인 지식과 체험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 아는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직접적인 지시이며 깨달음이다.

(로마서 3:11)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바울은 지적인 면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진술한 후 곧이어 인간의 의지적 무능력에 대해 진술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는 인간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해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1:28).

(로마서 3:12) 다 치우쳐

 히브리어 본문(MT)에서는 본 구절이 시14:3에서는 '사르'로, 시53:4에서는 '사그'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나 '가버리다', '떠나다'라는 의미를 비슷하게 갖는다. 70인역(LXX)은 본 구절과 동일하게 '여세클리난'으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여세클리난'은 '돌아서다', '피하다', '멀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상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올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을 돌이켜서 그 길을 떠났으며 그 결과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로마서 3:12) 함께 무익하게 되고

 이 말은 무익한 것을 추구하여 마음의 생각조차 부패해진 인간의 상태(1:21)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 그 자체에 악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할 뿐이다. 한편 '무익하게'의 헬라어 '에크레오데산'은 '유용한'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크레이오스'와 부정 접두어 '아'의 합성어 '아크레이오스'(쓸모없는)에서 온 동사 '아크레이오오'(쓸모없게 하다)의 단순 과거형이다. 이는 쓸모없게 되어버린 인간의 무가치한 상태를 지적하는 표현이다. 특히 함께 쓰여진 부사 '하마'는 '모든', '다'(*판타)의 의미와 더불어 '동시에', '즉시로' 등의 의미도 갖는다(행24:26). 즉 '모든'인간들이 '동시에' 무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로마서 3:12)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혹자는 본 구절을 '인간이 애정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alvin). '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타'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한 '선'을 의미하는 '아가도스'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선행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애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 또는 '애정'을 버린 자를 가리켜 바울은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1:31)라고 이미 선포한 적이 있다.

(로마서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팔레스틴에 있는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굴로 되어 있으며 그 입구는 돌로 막게 되어 있다(요11:38,41). 따라서 바울이 사람의 목구멍을 열려 있는 무덤에 비유한 것은 그 목구멍이 어떠한 것도 삼킬 만큼 넓다는 의미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4)고 비유적으로 책망하신 적이 있다. 인간은 입을 통해 온갖 더러운 것을 토해내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불이 수많은 나무를 태울 수 있듯이 인간의 혀도 자신의 영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조차 죽일 수 있는 지옥 불과 같다(약3:5,6).

(로마서 3:13)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시5:9의 인용으로 히브리어 사본에서는 '혀로 아첨했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70인역(LXX)은 이를 '혀를 유창하게 만든다'고 의역하였고, 본문의 원어도 이와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Lenski). '속임을 베풀며'의 헬라어 '에돌리우산'은 '속이다', '사기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돌리오오'의 미완료형 '에돌리운'에서 '뉘'대신에 '오산'이 붙어 반복적인 의미의 미완료형이 되었다. 즉 계속해서 속이고 사람을 죽이는 혀의 특성을 보여준다.

(로마서 3:13)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다(약3:2).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타인을 살리는 말이 나을 수 없고 오히려 죽이는 독이 가득할 뿐이다(약3:8). 이것은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함과 같고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약3:12).

(로마서 3:14)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본절은 시10:7의 의미를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저주가 자기에게 임한다는 사실을(시109:17-19) 깨달아야 한다. 몇몇 주석가들은 저주와 악독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저주하는 주체인 가해자와 악독을 당하는 피해자로 구분한다(Hendriksen).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을 대표적으로 '저주와 악독'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본 구절이 인간의 전적 타락을 뒷받침해주는 시구이고(Harrison), 문맥상 강조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3:15) 그 발은

 본문은 잠 1:16의 앞 부분과 동일하지만 다음 구절(16,17절)이 사59:7,8의 인용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59:7 상반절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12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선포한 후에 13절과 14절에서는 '말'에서 비롯되는 악행을 설명했으며, 본절에서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한 악행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입의 말과 악행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타락하여 부패해진 자연인의 마음에서는 어떠한 '선'도 나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할례를 받아야만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수 있다(벧전3:21).

(로마서 3:15)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피를 흘린다는 것은 악행에 대한 결과를 의미한다. '피'(*하이마)는 성경에서 '생명의 원천'(요1:13)또는 '생명의 좌소'(고전15:50; 히2:14)를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쏟아버리다', '피를 쏟아내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에크케오'의 단순 과거 부정사 '에크케아이'와 함께 쓰여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도발'의 의미로 쓰여졌다. 한편 '빠른지라'로 번역된 분사 '와세이스'는 신약성경에서 '날카로운', '예리한'(계1:16;2:12;19:15) 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본절에서만 '빠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는 '바르다'를 뜻하는 헬라어 '타키노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단어 '와세이스'를 쓴 것 같다.

(로마서 3:16) 파멸과 고생

 직접적으로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혹자는 이 표현을 인간의 지독한 잔인성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Calvin), 이미 2:9에서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선포한 적이 있다. '환난과 곤고'와 '파멸과 고생'은 모두 영혼이 지옥의 형벌 가운데 있을 때 나타날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로마서 3:16) 그 길에 있어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들의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라는 뜻이 된다. 본절은 앞절의 결론으로서 피흘리는데 빠른 발을 가진 '그들의 길에'(*엔 타이스 호도이스 아우톤)파멸과 고생이 결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공동번역은 '간데 마다 남겨진 흔적'으로 파멸과 고생을 이해하였으나 그보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미래에 주어질 형벌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인류의 잔혹한 피흘림은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결국 그 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런 파멸을 초래하게 된다.

(로마서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혹자는 '평강의 길'을 현실적인 평화 내지 이웃과의 화목으로 해석한다(Matthew Henry).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평강이라 해석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사9:6,7) 인간들에게 평강을 주시리라는 약속(학2:9)이 성취되었다(5:1). 이 평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됨으로 말미암아 현재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진다. 이 길은 (1)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요14:6) 동시에 (2)모든 사람들과 함께 화평을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마5:9; 딤후2:22). 또한 (3)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 가야 할 길과는 대조를 이루는 길로서 성도들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동시에 나타내는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은 결코 이 길을 찾을 수도 없으며 또한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얻을 수도 없다.

(로마서 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본절은 시36:1 하반절의 직접적인 인용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시14:1)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11절에서 17절까지의 인용 구절들에 언급된 부패상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머레이(Murray)는 본절을 보다 자세히 해석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평가의 중심부에서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계산 속에서도 사라지고 말았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Calvin)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사악함을 견제하는 굴레임으로 그 경외심이 사라질 때 온갖 종류의 방탕한 생활에 거침없이 탐닉하게 된다'고 설파했다. 아무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으며(신10:12; 수4:24;24:14;사50:10), 그러한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시31:19;103:13;147:11;잠1:7).

(로마서 3:19) 율법이 말하는 바.

 10절에서 18절까지 인용 구절들의 출처는 시편과 이사야서였다. 이 책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율법서'에 포함되지 않으나 통상적으로 바울은 구약성경 전체를 '율법'이라고 표현하였다.

(로마서 3:19)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

 헨드릭슨(Hendriksen)은 이 용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1)유대인. 랑게(Lange)와 리델보스(Ridderbos)가 이 견해를 따른다. (2)로마에 있는 신자들. 렌스키(Lenski)가 주장하는 견해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나 본서 어디에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로마에 거주하는 신자들에게 국한되었다는 암시가 없다. (3)모든 사람이 해당되나 특별히 유대인들. 어드만(C.R. Erdmann)에 따르면, 본 구절은 자기들의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애쓰는 유대인들과 그 밖에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징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진 전체 인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4)모든 사람, 세상 전체. 머레이(Murray)는 6:14의 '법 아래'(은혜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함)와 본 구절을 구분하여 본 구절은 율법이 적용되는 영역, 즉 온 세상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블랙(M.Black)역시, 정죄되어 하나님의 몽둥이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온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레이다너스(Greijdanus)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이 주장은 본절 하반절에서 모든 입, 온 세상,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용어들과 관련지어 볼 때 가장 타당하다 하겠다.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통치 영역하에 있는 모든 사람, 곧 온 세상을 지칭한다.

(로마서 3:19) 모든 입을 막고.

 '히나'(곳)가 이끄는 본 구절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결과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한다. 이 절속에서 반복된 '모든'(판)이라는 단어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특히 20절에 기록된 '모든 육체'(개역성경은 '모든'이라는 말을 번역하지 않았음)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강조한다. '막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게'는 '잠잠케하다', '멈추게 하다' 등의 뜻을 가진 '프랏소'의 제 2단순 과거 가정법 수동태형으로서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 앞에서 최소한의 변호마저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의 상태를 묘사한다. 여기서 (1)단수형을 사용하여 '입'(*스토마)과 '프라게'를 연결시킨 것은 '온 세상'을 하나의 집단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심판대 앞에 선 피고인들 각자의 침묵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2)또한 단순 과거 가정법을 사용한 것은 현재 가정법이 반복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작의 단회적 성격, 즉 심판대 앞에서는 심판의 단회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로마서 3:19)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

 율법의 기능은 심판대 앞에 있는 피고들을 변호하거나 또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죄되게 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심판대 앞에 기소하는 일을 감당한다. 그 대상에는 예외가 없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를 동일한 심판대 아에 서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하면서 심판을 논했을 때 이방인들조차도 이 심판에 대하여 알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사실 복음이나 율법을 접하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창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이방인들이 일반 계시를 통해 알 수 있었듯이 심판에 대한 계시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1:20,32). 따라서 '온 세상'(*파스 호 코스모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면서도 스스로 심판의 형벌을 해결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무능력이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율법의 세력권 아래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그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또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전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자 이 단어를 사용했다. 혹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적절하지 못한 번역이기에 '그러한 이유로'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한다(Murray). 그 이유로는 본절이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정죄 아래 있게 된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실을 알리는데 바울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든다. 내용의 흐름으로 비추어 볼 때 본절은 지금까지 전개해 온 논리에 대한 결론이 되면서, 21절 이하의 내용을 준비하는 단계라는 점에서 '그러한 이유로'라고 번역해도 되지만, 내용상으로는 '그러므로'와 별 차이가 없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이를 할례와 같은 의식에 관한 율법을 수행하며 복종하는 것으로 한정짓는다(Jerome, Pelagius).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연적(혹은 본성적)인 양심에 따라 수행되어지는 행위라고 한다. 이외에 혹자는 순전한 양심에 의한 율법의 행위, 고도로 개선된 자연적인 율법 행위, 의식 율법의 행위, 도덕 율법의 행위 이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Matthew Henry).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2:16; 3:2, 5, 10)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이 용어는 의식 율법 특히 할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본서에서도 바울은 이 용어를 '할례'에 대한 진술 후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18-2:22와 본장 10-18절의 내용은 모두 도덕 율법과 관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4:2에서 '율법의 행위'란 용어 대신에 단순히 '행위'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바울 서신 중 본서와 갈라디아서의 공통 주제인 '이신 칭의'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위 그 자체에서 나오는 어떠한 것으로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펠라기우스(Pelagius), 알미니우스(Arminius),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바울은 굳이 행위와 믿음을 대조하면서까지 강변할 필요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된 것이 된다(갈2: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구약성경의 율법, 나아가서는 양심의 법,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로마서 3:20)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포했던 사실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특히 그는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시143:2의 '인생'을 의도적으로 '육체'(*사르크스)란 용어로 바꾸어 인용했다. '사르크스'는 단순히 인간의 몸을 의미하는 헬라어 '소마'와는 달리 죄와 대항하기에는 무능력하고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의미한다.

(로마서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울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율법은 행하여 의롭게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결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요7:9;갈6:13). 그러면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가?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갈3:19). 율법은 인간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