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8. 09:32ㆍ구약 BIBLE/이사야
<이사야 48장 줄거리>
1. 패역한 이스라엘
12.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준비
20. 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하심
<이사야 48장 개역개정>
1. 야곱의 집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너희는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념하면서도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도다
2. 그들은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나
3. 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
4.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
5.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예로부터 네게 알게 하였고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네게 듣게 하였느니라 그것을 네가 듣게 하여 네가 이것을 내 신이 행한 바요 내가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명령한 바라 말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6.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7.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8.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11.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12.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13.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14.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
15.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
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18.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19.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
20.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 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21.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 48장 성경주석>
(이사야 48:1) 유다의 허리에서 나왔으며.
문자적인 뜻은 '유다의 물들에서 나왔으며'이다. 여기 물줄기의 근원, 수원지를 연상케 하는 '물들'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비슷한 용어가 유다의 혈통을 암시하는 또 다른 대목에서 사용된 바 있다 :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민24:7). 여기서 '유다'라는 호칭이 사용된 것은,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출생할 것에 대한 암시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창49:10). 즉, 그토록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백성들이 타락하였음을 강하게 책망하는 것이다.
(이사야 48:2) 거룩한 성 출신이라고 스스로 부르며.
'거룩한 성'이란 곧 예루살렘을 가리킨다(52:1;마4:5). 이곳이 그렇게 불리운 까닭은 성전과 특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인 법궤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거룩한 성'이라는 명칭 속에서 그곳에 사는 백성들의 행실과 성품도 거룩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Keil&Delitzsch).
이사야 48:3 본절에서 하나님은 과거에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장래의 일을 예언하시고 결국엔 그 일들을 성취했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그 성취는 이스라엘 백성이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홀연히 되어진 것임을 말씀하심으로써, 미래에 있을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의 성격도 그러할 것임을 암시하신다(42:9; 44:7,8; 45:21; 46:10).
(이사야 48:4) 완고하며.
문자적인 뜻은 '굳은'인데 이것은 멍에 메기를 거절하는 수소에서 그 의미를 따온 것이다. '굳은 목', '뻣뻣한 목', '얼굴의 굳음'(겔2:4). '마음의 굳음'(겔3:7) 등으로도 묘사되고 있는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의 율법을 거절하는 상태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영적 무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사야 48:4) 목은 쇠의 힘줄이요.
문자적인 뜻은 '목은 쇠 근육이요'이다. 이 비유 역시 멍에를 거절하기 위해 그 목을 뻣뻣하게 하는 황소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다.
(이사야 48:4) 이마는 놋이라.
이 표현은 흔히 수치를 모르는 매춘부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렘3:3). 그러나 여기서는 무감각하고 완전한 상태를 나타낸다(렘6:28).
이사야 48:5 본절의 핵심은 하나님이 세상 만물과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보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부패와 불신의 심성에 놓여져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을 입증하고도 남을 풍성한 역사적 경험과 말씀을 통한 계시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에게 향하는 전철을 되풀이하였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사야 48:6)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한 일.
3-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 때문에 먼저 어떤 일을 예언하고 그 후에 그 일을 성취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본절에서는 하나님이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데 그 일은 이스라엘이 들어보지도 못한,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이 일은 1차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일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은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구원 사역의 완성일 것이다(Fausset).
(이사야 48:7)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43:16-21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그곳에서 저자는 출애굽 사건을 '옛적 일'로 말하면서 '새 일'을 언급한 바 있으며 그 '새 일'을 그토록 놀라웠던 출애굽 사건마저 압도할 만한 어떤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한 사건이라면 바벨론 포로 귀환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래로 말미암는 구원 사역까지 포함시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이사야 48:8)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분명히 동사 '피트하'가 능동태이므로 본 구절의 정확한 원문 직역은 '네가 너의 귀를 열지 않았다'이다. 그리고 본절에는 바로 앞 구절들과는 달리 귀기울일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본절은 이스라엘과 특정한 어떤 사건과의 관계를 밝히는 내용이 아니라 그들의 어떤 특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 어떤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번번이 영적 귀를 닫아온 민족이었다.
(이사야 48:8)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문자 그대로 보면 인간 개인의 출생 당시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사실 성경에 원래부터 부패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는 구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그러나 본서가 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한 단위로 보고 진술하고 있으므로,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생, 곧 국가 역사의 시초로부터 하나님을 거역한 사실을 지적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
(이사야 48:9) 내 이름을 위하여.
이 표현은 고레스에게 주신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45:5)라는 표현과 배치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곳의 '위하여'가 사용된 배경은 다르다. 45:4에서는 하나님이 고레스를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고자 하셨음을 밝히는 반면, 여기서는 이스라엘 구원 자체의 궁극적인 이유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만유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른 것이다(J.Watts).
(이사야 48:10) 은처럼...택하였노라.
여기 '택하였노라'는 '시험하였노라'가 그 원문적인 뜻이다. 당시 제련 과정에서는 광물들을 용광로에 넣음으로써 그 찌꺼기가 가라앉고 순수한 원물질만 남았다. 이와같이 용광로에 광물을 넣는 목적은 순수한 물질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용광로에 광물을 넣는 것과 같은 시련이 많았지만 광물의 경우와는 달리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하는 바이다(Whybray).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고 죄를 고백케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저 아무런 효과없이 시련이라는 용광롤 속에 넣었다 뺐다 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건국 이래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입증한다.
(이사야 48:11)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 무지 때문에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바른 계시를 이해하지 못했고 현재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있다. 그런데 그러한 실상 때문에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신다면 이방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를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신의 승리로 착각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및 이방이 전혀 알지 못한 '새 일'(6절)을 행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것이다.
(이사야 48:12)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41:4과 외관상으로 유사하지만 그곳에서는 '역사성'을 강조하는 '도르'가 사용되었고(41:4에서 '만대'로 번역됨) 이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역사성'보다는 온 우주의 흥망성쇠를 쥐고 계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
(이사야 48:13)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문자적인 뜻은 '내 오른손이 하늘을 재었다'이다. 40:12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 그리고 그 능력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특히 만물을 창조, 보존하시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을 모르실 리 없다. 자신이 만물의 흥망성쇠를 쥐고 있음을 강조하여 이스라엘의 관심을 집중시킨 후 하나님께서는 시야를 좁혀 이스라엘 영역 속에서 되어질 일을 소개하고자 하신다.
(이사야 48:14)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벨론 위에 시행할 고레스를 가리킨다. 그러나 '사랑하는'이란 표현이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도덕적 품성을 기뻐했다거나 그가 경건한 자였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도구로서 하나님이 기뻐할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고레스에게만 적용하기에는 너무 강한 표현이다. 이 표현을 온전히 적용할 대상은 메시야이신 예수 뿐이시다(눅3:22). 그렇다면 이 표현은 메시야의 예표적 인물로서의 고레스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이사야 48:15 본절의 특징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 '나'가 세 번씩이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특징은 이방 왕 고레스를 선택하고 그로 흥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임받게 만드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하에 되어짐는 일임을 드러낸다. 원문에 보면 '그 길이 형통하리라'가 그가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하리라'라고 되어 주어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같은 인칭의 변화는 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자 고유의 기법이다(Barnes).
(이사야 48:16)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보내셨느니라.
본 구절을 기점으로 화자가 하나님에서 본서 저자인 선지자로 바뀌고 있다. 먼저 '신'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데, 이 용어가 나온 것은 저자의 사역이 자신이 아닌 성령에 의해 되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화자가 바뀜으로써 이어질 예언의 내용, 곧 17-22절이 몹시 중요한 내용임을 기대케 한다.
(이사야 48:17) 구속자시요...여호와라.
본절은 저자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수식어들을 사용한 데다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직접 연이어 놓음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본문의 수식어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인 이스라엘간의 언약 관계가 여전히 존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사야 48:17) 가르치고...인도하는.
이 용어들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는 일을 압축시켜 놓은 것인데, 원문에 보면 이 용어들은 분사형으로 되어있다. 이 사실은 괄목할 만한데 히브리어에서 분사형은 계속되는 상황을 강조할 때 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부각된다.
이사야 48:18 얼핏보면 본절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것 같지만, 사실은 백성에게 의도한 하나님의 축복의 풍성함을 역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사실은, 본절이 지닌 시적 성격을 드러내 보면 잘 알 수 있다. 본절에 드러난 하나님의 축복 부분만 시적 구조에 충실하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 '강과 같았(겠)다. 넌의 평강이 그리고 너의 의가 바다 물결 같았(겠)다.' 본절의 주안점은 무한한 평강과 의에 있는 바,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축복이다. 즉, 평강과 의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분의 백성이 되는 언약 관계에서 나타나는 축복이다.
이사야 48:19 18절과 본절 상반절에는 축복이 기록되고 있는데, 전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내적 축복인 반면 후자는 외적 축복이라 봐도 무방하다. 특히 후자의 내용은 낯익은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축복을 반영하고 있다(창22:17;32:12).
(이사야 48:19)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이름이 끊어진다는 것은 그 백성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반역으로 일관된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아울러 여기에는 혈통적, 민족적 개념의 이스라엘을 영적 이스라엘로 대치시키고자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어렴풋이나마 시사되고 있는 듯하다. 즉, 언약 백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쥐고 있던 그 영광스러운 신정 체제는 이제 망각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그림자와 모형의 시대가 지나가고 왕되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이 넌지시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48:20) 피하고.
압제하는 민족으로부터 온갖 수단을 다해 탈출해 나오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 놓았으니 그냥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이제 나온 자들은 그냥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쁨으로 찬양하고 땅 끝까지 그 사역을 선포할 것이다.
이사야 48:21 본절에는 과거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가 그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20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보증물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본서 저자는 바벨론 포로 사건이 이미 발생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가 서 있는 시점은 바벨론 포로 사건이 일어나기 100여년 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인 1차 독자들에게 바벨론 포로 기간 이후 귀환으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확실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준하는 실제적인 보증물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이 제시하는 사건은 광야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모든 사건을 망라해서 대표적으로 제시된 사건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이 본절은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근거로 하여 20절에 나타난 앞으로 있을 구원 사역을 튼튼하게 제시하고자 의도된 것이다. 반복하지만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여호와의 위대한 구원 사역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본서가 암시하는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사역이란 옛날 출애굽으로 대표되는 구원 사역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랍고 새로운 구원 사역인 것이다. 이 새로운 구원 사역은 천지를 처음 창조한 하나님의 사역에 필적한 것이며, 그 창조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 주며, 그 목적을 완성시켜 주는 새 창조의 사역임을 이미 40장 이후부터 저자가 계속 시사해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49-53장에 서술되고 있는 메시야의 사역에 관한 내용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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