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5. 16:40ㆍ구약 BIBLE/로마서
<로마서 4장 줄거리>
1. 아브라함의 믿음
<로마서 4장 개역개정>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장 성경주석>
(로마서 4:1) 그런즉.
2: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처럼 별 의미 없이 다른 화제로 전환하고자 사용된 접속사이다. 자세한 것은 2:1주석을 참조하라. 2:19-31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제 본절부터는 이신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다.
(로마서 4:1) 육신으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사르카'는 직역하면 '육신을 따라'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하나는 '우리 조상'과 연결된 수식어로 해석하는 경우이며 (2)또 하나는 동사 '얻었다'를 수식하는 부사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두고 있는데 만약 '얻었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가 '아브라암'(*아브라함)앞에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면 '카타사르카'는 (1)의 의견에 따라 자연적인 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휴레케나이'를 '헤몬'(우리)뒤에 위치시키는 소문자 사본들에 의해 해석한다면 '카타사르카'는 (2)번의 의견에 따라 윤리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육신의 원리를 따라' 또는 '율법의 행위를 따라'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Murray) 바울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육신'의 개념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했으며(8:4,5,12; 고전1:26) 때로는 '육신으로'라는 표현을 '썩어질 육체의 소욕과 충동에 의하여'라는 경멸적인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순수한 자연적 출생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할때(1:3)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육신적인 형제 관계로 표시할 때 등이다(9:3; 고전10:18). 이와 같은 의미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바울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혈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육신'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칭하는 말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서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 보통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3:31). 한편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Lensk, Calvin, Meyer, Godet, Hodge)은 '육신으로'라는 말을 '얻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을 '행위' 또는 '율법'의 의미로 취급한다. 이 경우 본절의 뜻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의문문 형태가 된다. 본 구절의 앞 뒤의 문맥으로 보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2절; 3:27) 사실이므로 본절의 '육신으로'라는 의미는 유대인의 조상된 아브라함의 혈연적 관계를 뜻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자랑할 만한 것' 또는 '율법의 행위'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4:2) 얻었다 하리요.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는 완료형으로 '발견했다'(have found), '얻었다', '만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단어의 삽입에 의문을 제기하여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d, Murray).이 견해를 취할 경우 '육신으로'는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란 대명사는 바울과 유대인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3:9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2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이란 구절은 '얻었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얻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어야 바울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로마서 4:2) 아브라함이.
바울이 아브라함을 설명한 것은 유대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3살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할례와 율법을 예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들 역시 창15:6의 말씀을 인용해 아브라함의 공로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후사가 되어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Hendriksen). 그 당시의 유대교적 가르침보다 성경을 중요시한 바울은 '나는 너를 열방의 조상으로 세웠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을 칭의를 받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본질적 통일성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돌이켜 보는 믿음 속에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해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에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의'의 개념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로마서 4:2) 행위로써.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으나 바울은 율법의 원리 곧 행함의 원리를 아브라함 시대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1)믿음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2)행위의 원리가 단순히 모세에 의해 주어진 율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로마서 4:2) 만일...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바울은 '에이'(만일)에 부정 과거 직설법 수동태 동사 '에디카이오데'를 연결시킴으로 하나의 조건문을 만들었다. 이 조건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논리적이며 형식적인 가정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근거에 있어서는 '없느니라'는 부정(不定)을 유도하는 조건문으로 인정하는 반면, (2)혹자는 바울이 부정 과거가정법을 사용해 단회적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한다(Lenski).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행위로'(*여스 에르곤) 의롭다함을 받았으므로 일차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는 바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3:19-31에서 말한 것과) 증명하기 위해 '여스 에르곤'과 '여스 에르곤 노무'(율법의 행위)를 서로 구별하려 한다. 신앙의 행위로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자랑과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행위'인 바, 바울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고후11:21; 12:12)과 같은 성격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자칫 믿음을 공로로 인정하는 유대 랍비적 교훈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1절 주석 참조).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에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공로조차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편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Murray)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근거가 있다는 형식적 논리를 인정하나 그 논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구절은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바울은 가정적인 추론 속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고 보다 확실하게는 가정문을 반증(反證)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창15:6을 인용하고 있다.
(로마서 4:2)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본문에는 누구에게 자랑하는 것인지 그 자랑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자랑할 것'이란 말을 '영광받을만한 것'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다(Meyer). 그렇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광을 주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는 구절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전체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카도스 게그라프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3:10).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기 의함이다.
(로마서 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본 구절은 창15:6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약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2:21은 창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로마서 4:3)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106:31은 비느하스의 열정적인 행위로 인해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느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해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느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Murray). 경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과 '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는 '로기조마이'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로마서 4:4) 일하는 자에게는.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로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Calvin). 본절 전체가 일상적인 고용 관계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서는 1차적으로 삶을 위해 일하는 일꾼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다음절에 기록된 '일을 한 것이 없는 자'와 '믿는 자' 등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단지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로마서 4:4) 그 삯이.
일꾼이 요구하는 '삯'(*미스도스)은 문자적으로 일해준 것에 대한 품삯을 의미하지만(눅10:7; 딤전5:18) 은유적으로는 '보상'(reward)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약에는 삯을 뜻하는 말로 '와소니온'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눅3:14에 병사의 급료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본서에서는 죄의 '삯'(6:23)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꾼이 그의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이 정당한 요구를 '빚'(*오페일레마)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로마서 4:4)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빚'(*오페일레마)은 '삯'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으나 '은혜'(*카리스)와는 대조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빚'은 히브리어로 '맛솨아'로서 주로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는 바, 채무 관계를 지적하는 데 쓰여졌다(출22:25). 무엇을 빌린 자는 반드시 갚아야 했으며 만일 채무자가 정당하게 갚지 못했을 경우 채권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채무자로부터 생계 수단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전당물로 잡을 수 있었다(신24:6). 신약에서 '오페일레마'는 구약에서와 같이 사업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며(눅7:41) 특히 비유 속에서는 채무자를 용서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할 때 쓰였다. 채무자는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눅12:57-59) 또한 송사(訟事)하는 자에 의하여 재판관에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일하는 자가 삯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채권자가 송사하는 것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탕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일'은 자랑이며 동시에 정당한 자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일하는 자들의 정당한 삯을 언급함으로써 다음절에 나오는 일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칭의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에게 있어서 행위의 결과는 일꾼이 일한 것에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만한 자리가 없다. 오로지 행위의 주체인 자신의 자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삯을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가 아니라 의를 얻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이 본절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해 계속 진술했듯이 오직 하나님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보시고 의롭다하신다. 4절에서 볼 때,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관련된다(엡2:8).
(로마서 4:5) 경건하지 아니한 자.
이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애쓰지 않는 자와 동의어지만 죄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고 있다(Murray).
(로마서 4:5) 의롭다 하시는.
'의로 여기시나니'(*톤 디카이운타)라는 현재 분사형 표현은 그 시제에 있어서 '믿는 자'(*피스튜온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철저하게 믿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도 임한다는 구원의 진리를 적용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도 일치한다.
(로마서 4:6) 일한 것이 없이.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코리스 에르곤)라는 의미를 지닌다(without works, KJV).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로마서 4:6)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은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Black).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로마서 4:7) 불법이...복이 있고.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이다. 이 말은 '율법'(*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아'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과 '죄'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아페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에페칼뤼프데산)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시6:1). 한편 '아페데산'과 '에페갈뤼프데산'은 둘 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해 이뤄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로마서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죄'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4:9)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로마서 4:9)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반복되는 것이다.
(로마서 4:10) 그것이 어떻게 역여졌느냐.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로마서 4:10)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창15:6;17:23,24).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행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갈2:12).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해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의 전가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해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로마서 4:11)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창17:10,11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되어 있다.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에 언약을 맺은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해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로마서 4:11)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인'(*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을 봉하거나(계5:1),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딤수2:19; 계7:2)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떤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해 그의 죽음을 확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마27:65). 이와 같이 인(印)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졌다. 다시 말해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엡1:13;4:30)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4:11)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바르트(K,Barth)는 본절을 주석하면서 원(元)역사계와 역사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원역사적인 사실의 믿음의 의가 역사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 사건은 원역사적인 것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암시적으로 율법쳬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은 원역사적인 하나님의 의가 현 역사 속에서 단순히 나타나진 것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이 의의 전달 내지 계시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3:31). 성도의 신앙은 히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가 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있게 된다.
(로마서 4: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했으며, (2)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로마서 4:12) 무할례시에 가졌던.
본절에서 '할례받을 자들'과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속에 잘 나타나며(행16:3) 또한 할례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갈2:3).
(로마서 4:12)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고후12:18)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벧전2:21)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갈6:17). 본절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8:39)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는 '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춰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갈5:25; 빌3:16).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4: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이 약속은 창17:4-8에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갈3:1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17:8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좇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갈3:29).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해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로마서 4:14) 율법에 속한 자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 또는 '율법의 체계에 종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Roma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갈1:7),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1:8,9).
(로마서 4:14) 만일...상속자이면.
'상속자'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약속의 땅 가나안(창12:7;13:14,15), (2)믿음으로 자손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한 후손 메시야에 의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요8:39). 한편 본절에 대해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5:20).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해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로마서 4:14)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헛것이 되고'(*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버린다면 약속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될 것이며(*카테르게타이, '폐하여졌다') 또한 법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받았던 아브라함의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에 의해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다(신28:58). 따라서 인간의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의 직분'(고후3:9)이라고 진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갈3:13).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로마서 4:15)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창6:9).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창6:5)은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로마서 4:16)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음으로'(*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디아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디아'를 사용하지 않고 '에크'를 사용한 것도 믿음이라는 것을 수단과 방법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해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믿는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로마서 4:16)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15절).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로마서 4:16)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14절). 이런 사실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은 '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12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로마서 4:16)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손은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 뿐이다.
(로마서 4:17)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바울이 여기서 창17: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아브라함이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위한 것이다.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몯은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해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한다(J.Murray).
(로마서 4:17) 그가 믿은 바 하나님.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을 정의하며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신관을 정의한다.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1)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단느 것이며 (2)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16절)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정의한 후에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확고히 하신 '아브라함의 조상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로마서 4:17) 죽은 자를 살리시며.
이 구절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엡1:20). 본절에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1)이삭의 출생이며 (2)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까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Lenski, J.Murray, E.F. Harrison). 사실 '죽은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24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두 가지의 핵심적 진리를 동시에 증거하였다.
(로마서 4:17)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
이 구절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마3:9; 눅3:8)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그 분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신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본절과 같이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
(로마서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속자는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고했다(창15:2).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번성케 하실 것을(창15:5)믿었다.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라고 함과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공포와 전율] 중에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에 대해 믿음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와 모순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랐기 때문에 소망이 성취된 뒤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20절). 그는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확신'은 과학자가 세워놓은 가설을 추론하여 밝혀진 사실(비록 이 사실이 진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또는 추론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목적의 결정성(determinateness), 곧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바라는 것이기에(J. Murray) 전제된 가설을 추론해 믿는 과학적 확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로마서 4:18)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이 내용은 창15:5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말씀의 인용구이다. 여기서 '후손'이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만, 창세기 본문에서나 본절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모두를 지칭한다(16절 주석 참조).
(로마서 4:19)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바울은 생식 능력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헬라 본문에서 '죽은 것 같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네네크로메논)언급되어 있으며, 사라에게는 명사형(*네크로신)으로 언급되어 있다. 사라에게 명사형으로 사용된 것은 앞에서 사용된 분사형의 반복이며, 아브라함에게 완료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미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그리고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사용된 '같음'이란 말은 헬라 본문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특히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있지 않으나 헬라 본문에는 '이미'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데'가 사용되어 두 사람 모두 생식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씀이 '이미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시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4절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사라의 태가 생산 능력이 없는데서 생산의 능력을 갖추게 된 사실과 영적으로 일맥상통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생산 능력이 없는 사라가 그의 후손을 생산하게 된 것이나 죽었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주는 영'(고전15:45, life-giving-spirit)으로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로마서 4:20)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다'의 헬라어 '디에크리데'는 '디아크리노'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아브라함의 의심하지 아니한 행위가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디아크리노'는 '가려내다'(마16:3), '구별하다'(약2:4) 또는 '스스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다'(14:23;막11:23)라는 의미인데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확신'(*플레로포레오)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해서 (*에프 엘피디)믿음으로 살았기에 갈등할 수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로마서 4:20)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에서 '믿음'(*피스테이)은 앞에 전치사가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메첸(Machen)은 전치사가 없는 단순한 여격은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예로 '에게이론 타이 토 로고 투 퀴리우'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일으킴을 받는다'를 의미하는데 주님의 '말씀'이 '일으킴을 받게 되는'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믿음'이 '강하여지게 되는'수단이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가 발생한다. 창15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는 사실이 창17:17의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말씀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야곡에 대해 이와같이 분명하게 의심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고 진술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비록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하여져서 의심을 하였으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해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Hendriksen)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아브라함이 의심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그의 자손이 수없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문자적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하갈의 자식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8)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15장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창17:19-21에서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의 약해진 믿음을 다시 확고히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난 자만이 그약속을 성치시킬 것이라는 점을 아브라함에게 못박으신 것이다.
(로마서 4:2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본 구절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창17:19-21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보증받은 아브라함은 곧 바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명하신 할례 의식을 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방법에 대해 확고히 믿게 되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로마서 4:21) 약속하신 그것.
본문에 언급된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17절)는 것과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18절)고 한 것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확신에 의해 얻어낸 보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아브라함의 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분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나타내신 목적있는 작정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4:21)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이 말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창18:14)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해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창18:19)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본절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힘과 활기를 완벽하게 표현해주고 있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로마서 4:22) 그러므로.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므로'(*디오) 다음에 '카이'가 언급되어 있다. '카이'는 일반적으로 접속사로 사용되어 '그리고'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또한 역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9절 하반절에서 언급했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을 다시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로마서 4:23)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실은 동시성(Synchronism)과 통시성(Diachronism)을 동시에 지닌다. 즉 그 원리는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 성경 자체의 증거로는 15:4; 시102:18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며 모세 이후부터는 율법만이 적용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다.
(로마서 4:24)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있는 23절의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내용과 호응을 이룬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제를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과 신약 시대에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용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현될 약속'에 대한 것인 반면, 신약 시대 성도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로마서 4:25) 예수는...살아나셨느니라.
본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성두에게 적용시키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구절을 대조시키고 있다. 즉 '우리 범죄함'과 '우리를 의롭다 하심'이 대조되어 있고,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와 '위하여 살아나셨으니라'가 대조되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해 살아나심은 대속의 결과인 '의'를 보증하고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24절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것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성도들에게 다시 적용시키는 논리의 순서를 밝히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수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53:1-9과 같이 구약 시대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을 위해 더 유익한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5장에서 8절까지 줄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의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 진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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