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1장 성경주석

2022. 11. 7. 13:17구약 BIBLE/로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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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장 줄거리>

1.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11. 이방인의 구원

25. 순종치 않은 이스라엘을 위한 긍휼

 

<로마서 11장 개역개정>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1장 성경주석>

(로마서 11:1)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9장과 10장에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리스도를 거부한 모습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수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그가 본서신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3:4,6,31; 6:2,15; 7:7,13; 9:14) 단호한 부정적 표현인 '그럴 수 없느니라'(By no means, NIV)는 말로 답변하고 있다. '하나님이...버리셨느냐'로 번역된 헬라어 '메 아포사토 호 데오스'에서 '메'는 부정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 형태이다. 또한 '자기백성'(*톤 라온 아우투)에서 인칭 대명사 '자기'(*아우투)라는 용어 속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시지 않았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Godet). 1절에서 제기되는 이와 같은 질문은 11장 전체의 주제가 되고 있다.

(로마서 11:1)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들어 이스라엘이 결코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답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손인 사도바울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버림받지 않았다는 하나의 산 증거이다. 예전에 그가 복음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갈1:13,14; 딤전1:13-15)은 이스라엘이 가진 불신앙(10:21)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은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로마서 11:2)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자기 개인의 경우를 예로 들었던 바울은 이제 왕상19:1-18에 기록된 엘리야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은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은 특별히 왕상19:10,14,18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의 종교가 극도로 부패한 나머지 여호와를 바로 섬기는 자가 엘리야 한 사람뿐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당시에도 하나님이 남겨두신 참 성도7천 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로마서 11:2) 미리 아신 자기 백성.

 몇명의 주석가들(Origen, Augustine, Chrysostom, Luther, Calvin 등)은 이 말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은 1절에서와 같이 유대 민족, 곧 메시야의 구원과 관련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암시한다고 봄이 타당할 듯하다(Meyer, Godet).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배척(排斥)했다. 이러한 민족적 불신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그들의 눈이 열려 그들의 메시야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때 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마침내 메시야를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계신 것이다.

(로마서 11:2) 엘리야를 가리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엘리아'는 문자적으로 '엘리야 안에' 또는 '엘리야로'(수단의 여격)라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인용구이다(막12:26; 눅20:37). 래빈스(Rabbins)에 의하면, '엔 엘리야'는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History of Elias)를 뜻한다고 한다.

(로마서 11:2) 그가...고발하되.

 '엔튕카네이'는 '청구하다'(행25:24), '간구하다'(롬8:27,34)는 의미로 본절에서 전치사 '카타'(*; against)를 동반하여 '...거스려 송사하다'의 뜻을 갖는다. 여기서 '송사한다'는 표현은 이상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완전히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모습(왕상19:10,14)을 목도한 엘리야는 자신의 민족을 하나님 앞에 송사하며 멸망시킬 것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엘리야의 기도는 민족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자신의 민족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중하게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Calvin).

(로마서 11:3) 그들이...헐어버렸고.

 본절에서 바울은 왕상19:10,14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선지자들을 죽인 것을 먼저 말한 후 제단 훼파를 서술함으로써 그 순서를 바꿔놓았다. 거기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로마서 11:3) 제단들을.

 '뒤시아스테리아'는 '뒤시아스테리온'(제단)의 복수형이다. 율법에 따르면 합법적인 제단은 예루살렘 한 곳 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율법은 그외 다른 곳에도 합법적인 제단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예컨대, 하나님이 현현하신 '벧엘'같은 곳에 쌓은 제단은 제단으로서의 권위가 인정되었다. 더욱이 그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사드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러한 상황 속에서 믿음이 신설한 자들은 과감히 예루살렘 외에 다른 곳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을 거서이다(Godet).

(로마서 11:3) 나만 남았는데.

 혹자는 '나만'(I...alone)이라는 말은 '모든 선지자들 중에 홀로'(alone of all the prophets)라는 뜻으로 해석했다(Meyer). 이러한 해석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대답과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칠천 명의 남은 자들은 선지자들이 아니라 단순한 경배자들(worshipers)이었다. 엘리야 외에는 선지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담대히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없었다. 선지자라 이름하는 자들은 모두 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 뿐이었다. 

(로마서 11:4) 대답.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마티스모스'는 하나님의 신탁을 의미하는 말로서 대답의 계시적인 특성과 권위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로마서 11:4) 바알에게.

 헬라어 '테 바알'의 '테'는 여성정관사이다. 그당시 페니키아인들에게 '바알'은 태양을 상징하는 남신으로, 아스다롯(Astarte)은 달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본절에서 바알에게 여성 정관사를 쓰고 있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70인역에는 바알이란 이름에 남성과 여성을 병용해서 쓰고 있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70인역에는 바알이란 이름에 남성과 여성을 병용해서 쓰고 있다. 그러므로 바알이 양성체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바알신'이 아니라 단지 '바알상'을 여성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 그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 정관사를 바알 앞에 붙이고 있는 것 같다.

(로마서 11:4) 칠천.

 이 숫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도 그러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마13:21; 막6:44). '7'은 완전수를 의미하는 것이므로(출25:37) 7천이라는 숫자는 영원 전부터 구원을 얻기로 선택된 엘리야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보호받고 있었음을 상징한다.

(로마서 11:5) 남은 자.

 바울은 엘리야 시대의 상황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시키면서 그때에 남은 자 칠천명이 있었던 것같이 자신의 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하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바울 주장의 요지는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불신과 배교가 만연했다 하더라도 '남은 자'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사랑하셔서 택했다고 하는 것이다. '남은 자' 사상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먼저 창세기에 살펴보면, 노아의 때에 소수의 택함받은 자만이 구원을 받았다(창6:1-8; 눅17:26,27; 벧전3:20). 롯의 때에도 그러했다(창19:29; 눅17:28,29). 이사야 시대에는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이 있었다(사6:13; 10:32). 이 외에도 구원은 선택된 남은 자들의 것이라는 사상이 구약 여러 구절에서 발견된다(사1:9;11:11,16; 렘23:3; 31:7; 욜2:32; 암5:15; 미2:12; 4:5-7; 7:18; 습3:13). 특별히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은 그 이름 자체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으로서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을 대변해 준다.

(로마서 11:5)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은혜로 택하심'(the election of grace, KJV)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한다. 이것은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결정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선행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로마서 11:6)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남은 자'(remnant)로서의 특전을 누리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지 자신들의 행위로써 된 것이 아니다 .본절에서 바울이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 이유는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남은 자 사상을 오해하여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갈1:6-9; 3:1-5).

(로마서 11:6)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만일 인간편에서 한 행위가 하나님의 '택하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다. 사실상 율법적 행위를 근거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반복음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되지 못하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 기네타이'는 '더이상...이 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율법적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되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적(unconditional)이다. 이 무조건적인 은혜를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그 은혜에 응답할 때 택하심을 받을 수 있었으며 바로 그러한 자들이 본장 5절에서 나오는 남은 자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민족적으로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갔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다(1절). 그 후 이스라엘 가운데 소수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그 질문을 부정으로 답했다(2-4절). 그리고 교회의 핵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소수의 '남은 자'가 있음을 언급했다.

(로마서 11:7) 그런즉 어떠하냐.

 지금까지의 논리 전개의 핵심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린게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가 있다는 데에 있다. 이제는 그 남은 자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선택된 소수, 즉 '남은 자'에 관하여 말한 후(1-6절), 이제 대상을 바꾸어 이스라엘의 완악한 다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행위가 수단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로는 구원이 불가능했다.

(로마서 11:7) 구하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제테이'는 현재 시제로 기본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상태나 동작을 의미하므로 이스라엘의 구하고자 하는 태도가 반복적으로 꾸준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독특한 용법이 사용되었다. 같은 문장 속에 나오는 또 다른 동사들('얻었다'와 '완악하여졌다')이 시점상 나중임에도 불구하고 과거형으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구하는'의 헬라어 '에피제테이'는 역사적 현재(Historical Present) 용법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생생하게 구사하기 위한 표현법이다. 결국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일반적으로 '행위를 통한 칭의'를 매우 열정적이고 반복적으로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로마서 11:7)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본문의 '우둔하여졌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로데산'은 '포로오'(두꺼운 가죽으로 가리다)의 단순과거 수동태로 어감이 강하다. 이에는 인간 본래의 감성이나 도덕성의 근원을 상실했다는 뜻이 포함된다. 결국 그들은 오성이나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분간하는 양심의 기능 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노력해왔어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본절을 통해 바울은 보여주고 있다. 택하심을 받지 못한 '남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인데 그 결과롤 그들은 완악하게 되었다.

(로마서 11:8) 기록된 바...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모세와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했던 것과 같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에도 그 백성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기록된 바'에 해당하는 구약성경은 신29:4과 사29:10에 해당하며 좀 더 정확하게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인용한 것(행28:26,27)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Calvin). 또한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사용되었다(마13:14,15; 막4:12; 눅8:10; 요12:40).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나타내는 본 구절의 특성으로 봐서 유대인의 상태는 도무지 구원 섭리와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대하게 하고(13절 이하),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로마서 11:8) 오늘까지.

 이 말은 신29:3(MT)에 '아드 하욤 하제'라고 되어있는데, 70인역은 이를 '헤오스 테스 헤메라 타우테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모두 '이날까지'라는 의미인데, 바울은 '이날'(*헤메라 타우테스)을 '오늘날'(*세메론 헤메라스)로 변형시켜 인용하였다. 이처럼 바울이 표현을 변형시킨 이유는 말하고자 하는 것의 주안점과 과거 구약 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 당시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1:8) 혼미한 심령.

 '혼미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뉴세오스'는 '찌르다'(행2:37)라는 의미를 가진 '카타뉴소'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너무 많은 자극으로 말미암아 감각이 무디어진 마비 상태를 말하고(Robertson),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처럼 어리둥절해진 것을 의미한다(Lenski).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즉 이 말의 참 의미는 그 말씀으로 많이 자극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무감각해졌다는 것이다.

(로마서 11:8) 보지 못할 눈.

 '눈'이란 육체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분별력을 의미한다(사6:9,10; 마13:14,15). 눈은 우리 몸의 감각 기관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외부 세계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인지한다. 그러므로 눈이 멀었다는 말은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인 능력이 결정적으로 상실됐다는 말이다.

(로마서 11:8) 듣지 못할 귀.

 바울은 믿음이란 들음에서 생겨난다고 하였다(10:17). 그러므로 들음이란 믿음에 이르는 통로이며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수단이다.

(로마서 11:8) 하나님이...주셨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 호 데오스'는 유대인들의 심령이 혼미해지고 눈과 귀가 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는 것이다(1:21-31).

(로마서 11:9) 또 다윗이 이르되.

 본절은 시69:22의 인용이다. 사도 바울은 어순이나 표현에는 약간의 변형을 취했으나 그 의미는 변질시키지 않았다. 먼저 본절의 앞 구절을 70인역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절 게네데토 헤 트라페자 아우톤 에이스 파기다 카이 에이스 데란 그들의 식탁이 올무와 덫이 되게 하시고, LXX 시8:23(개역 게네테토 헤 트라페자 아우톤 에노피온 아우톤 에이스 파기다 69:22) 그들의 식탁이 그들 앞에서 올무가 되게 하시고, 바울은 '그들의 목전에'(*에토피온 아우톤)라는 구절은 빼고 '덮으로'(*카이 에이스 데란)라는 말을 삽입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을 '올무'(*에이스 파기다)라는 말 뒤에 놓음으로써 '올무'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시키고 있다.

(로마서 11:9) 밥상.

 밥(음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밥상'위에 있는 음식을 먹음으로 연명해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밥상'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밥상'은 단순한 밥상이 아니라 '그들의 밥상'(*헤트라페자 아우톤)이다. 즉,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진 '밥상'이다. 따라서 이 '밥상'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생명의 밥상' 곧 구원을 상징한다(창17:7; 출6:3,4,7).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밥상'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요6:35,58; 고전10:16)으로서 유대인의 땅 나사렛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이 '밥상'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인 '밥상'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거치는 것'이 되었다(9:33).

(로마서 11:9) 올무와 덫과.

 '올무'의 헬라어 '에이스 파기다'는 새나 짐승을 잡는 올가미를 나타내는 고대 단어이다. '덫'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데란'은 야생 짐승의 사냥을 나타내는 고대 단어였으나 후대는 덫을 뜻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70인역(시68:23)과 비교하면 '에이스 데란'(덫과)이 첨가되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비슷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열거함으로써 그 누구도 그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로마서 11:9)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거치는 것'의 헬라어 '에이스 스칸달론'은 덫 혹은 올무의 의미를 갖는다. 본 구절 역시 70인역과 비교해보면 아래의 도표와 같이 도치되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동의어에 해당하는 말을 재차 언급해줌으로써 더욱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단어는 앞 구절의 두 단어와 상호 보완적이며 서로를 설명하는 말로서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모든 유혹과 멸망의 방법을 의미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의 파멸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한편 '보응'은 70인역에는 없는 말이지만 중요한 맥락은 놓치지 않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셨다는 뜻과 유대인들의 어리석고 강퍅해진 그대로 하나님께서 버려 두셨으므로 버려둔 그 자체가 보응이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되게 하옵소서'(*게네데토)는 헬라어 문법에 있어서 명령형이지만, 하나님께 간구하는 투이다. 이 간구는 '보응'뿐만 아니라 앞에 서술된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에도 연결된다. 바울이 이 글을 인용한 것은 8절의 내용 즉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한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는 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본절과 70인역의 헬라어 본문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로마서 11: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눈은'이란 말은 8절의 '보지 못할 눈'을 연상케 하는데, 8절에서와는 달리 귀와 심령이 빠지고 '눈'만이 언급되고 있다. 본문에서 사울은 시69:23(LXX 68:24)을 그대로 인용했다. 8절에서 '눈'과 '귀'를 열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눈'만을 이야기한 것은 눈이 몸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며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눈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마6:22,23). '흐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티스데 토산'은 '스코티조'(어둡게 하다)의 단순과거 수동태 명령법으로 심각하게 저주하는 표현이다(Robertson). 여기에서의 눈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시편 기자의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현재적 심판에 적용했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오히려 자연양심(natural good sense)을 가진 이방인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해하지 못했다(Godet).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깨달을 수 없게 되었으니(마13:14,15), 그것은 곧 최대의 불행이었다.

(로마서 11:10)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등이 굽는 것은 노예들이 상전 앞에서 두려움을 갖게 될 때 취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이 완악해져서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한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율법의 종들이었으며 율법 선생 곧 랍비들에게 얽매여 있는 노예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이 없이 두려움에 거하는 존재들이었다. 이와 같은 징벌은 그들이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에 받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로마서 11:11) 내가 말하노니.

 혹자는 이를 '내가 질문하노니'(I ask, RSV)라고 번역하고자 하는데(Meyer), 이는 다음 문장이 질문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어 '레고'(내가 말한다)는 '에로타오'(내가 묻는다)와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 본문은 본절 뿐 아니라 24절까지 이어지는 전체 논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로마서 11:11)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이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문형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완악해지기는 했으나 절망적으로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족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타이산'은 '미끄러지다'의 뜻으로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완전히 엎드러진 것을 말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완악하게 된 상태를 염두에 두고 이스라엘의 실수가 크다는 것에 집중하여 언급한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넘어짐, 즉 복음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도록 하는 계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바울 당시에 실제로 이런 일은 얼마든지 목격될 수 있었다(행13:44-48).

(로마서 11:11) 그럴 수 없느니라.

 여기서 보여 주는 단호한 거부의 대답은 비록 이스라엘이 실족했더라도(7-10절) 그것이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완전한 패망의 넘어짐은 아니라는 것이다(Murray). 즉 이들이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고 강퍅해졌으나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은 바울이 계속해서 확언하는 이스라엘의 장래구원을 암시해 준다(Harrison).

(로마서 11:11) 그들이 넘어짐으로.

 헬라어 본문에서는 접속사 '알라'(그러나)가 사용되어 앞구절과 반대되는 견해를 암시한다. '저희의 넘어짐'은 '저희의 범죄'를 가리키는 것으로(Meyer, Murray) 구주이신 예수를 거절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거절로 인해 이방인에게 구원이 돌아갔다(마8:12; 행13:46).

(로마서 11:11) 이방인.

 유대인을 제외한 세계 모든 민족들을 말한다. 이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로 약속에 대한 외인이요 구원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었다(엡2:12). 바로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그의 백성이 되었다(Bruce).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구원이 더 이상 민족의 개념으로 제한되지 않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로마서 11:11)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시기나게 한다'(*파라젤로사이)는 것은 회개와 믿음을 일으키는 데에 가치있는 자극을 말한다(Murray). 이것은 이방인의 구원을 통해 유대인의 질투심을 유발시켜 회심할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다(Kasemann). 이러한 시기로 인해 비록 괴로움이 있기는 해도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된다.

(로마서 11:12) 세상의 풍성함.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여 구원 경륜에서 벗어났지만, 이스라엘의 복음 거부는 오히려 세상 전체가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도 바울이 흔히 사용한 '부요함'이란 말은 현재의 부한 상태나 종말론적 풍요를 의미한다(9:23; 빌4:19). 여기서의 '부요함'은 이방인의 구원을 통해 천국 백성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이방인의 은혜를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Godet).

(로마서 11:12) 그들의 실패.

 '혀테마'는 군사적 표현으로 '전투시에 넘어짐'과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빼앗김으로 당한 커다란 ㄴ실패(defeat)를 말한다(Murray). 바울은 '넘어짐'과 '실패'를 '충만함'과 대조시켜 이스라엘의 회심이 더욱 큰 은혜를 베풀 것임을 보여준다(Harrison).

(로마서 11:12) 하물며 그들의 풍만함이리요.

 충만함은 회심과 관련된 말로 남은 자와 대비되는 커다란 전체를 의미한다(Harrison). 또한 충만함이란 앞 부분의 실패와 연결해 볼 때, 숫자적으로 빈자리를 채운다는 개념(Godet)과 구원을 완성하는 개념(Murray)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회복되어, 그 구원받은 수가 충만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충만해진다는 것은 범죄와 대조를 이루어 불신앙과 범죄로 점철되었던 과거의 이스라엘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의를 얻어 하나님 나라에 복귀하는 민족이 될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이방인들이 부요케 된 것처럼 이스라엘이 충만하게 회복되면 전 인류의 부요함은 더욱 풍성해 질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11:13)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만큼'으로 번역된 '에프 호손'은 일시적 제한의 의미가 아니라 자격을 말한다. 즉 자신의 신분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에고'(나는)라는 대명사 앞에 '에이미'(...이다)를 두어 자신의 자격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자기 인식을 명확히 가지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임무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을 충만하게 할 뿐 아니라(25절)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며(14절) 충만케 하려는(12-15절)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로마서 11:13)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자기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그의 이방인에 대한 사역이 성공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의 구원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겨 이방인 구원에 최선을 다한 것을 말한다(Godet).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힘써 감당함으로써 이방인들의 구원이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하여 몇몇 유대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14절). 이렇게 자기의 직분으로 인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짐을 생각할 때에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Barmby).

(로마서 11:14) 내 골육.

 바울의 이 표현에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Harrison). 이러한 표현은 대개 혈통적인 형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창29:14; 삿9:2; 삼하5:1), 본절에서는 완악해진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남은 자'를 의미한다(Dunn). 바울은 비록 현재 상태로는 완악해 있으나, 장차 몇몇 이스라엘인이 구원에 동참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로마서 11:14) 시기하게 하여.

 '시기'가 흠정역(KJV)에는 '경쟁'(emulation)으로 번역되어 있고, 그 대상은 '온 백성'(10:19)으로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충만함을 보고 질투심과 어울러 경쟁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로마서 11:14)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얼마'라는 말속에서는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실족했으나, 바울은 그들 중에 얼마라도 구원받기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 11:15) 그들을 버리는 것.

 '버림'에 대해 혹자는 12절의 실패와 연결해서 해석하며(Godet), 혹자는 하나님께서 추방한 것으로 이해하는데(Meyer, Murray, Shedd), 후자가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버리는'은 '받아들이는'(*프로슬렘프시스)과 대조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호의와 축복으로부터 거절당함과 그의 나라에서 박탈된 것을 말한다.

(로마서 11:15) 세상의 화목.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을 의미한다(Kasemann). 혹자는 세상의 화목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복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Lenski). 어쨌든 화목은 원수된 처지에서 예수의 공로로 친선의 교통을 얻게 된 것을 의미한다(엡2:13). 과거에는 하나님의 거절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의 총애를 받게 된 것이다(Murrray).

(로마서 11:15)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본 구절은 어떤 뜻인지 확언하기가 다소 어려우나 유대인이 장차 회심하게 될 것을 부활에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스라엘로 인해 이방인들의 구원에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로마서 11:16)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가지도 그러하니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 헤 아파르케 하기아, 카이 토 퓌라마'가 70인역(민15:20-21)에서는 '아파르켄 퓌라카토스'(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떡덩이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처음 익은 곡식'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이해한다(Harrison). 그러나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성을 가진 족장이나 조상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Murray). 반면에 '떡덩이'는 회심한 이스라엘 민족을 뜻한다. 이러한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대표성을 의미한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르케'는 '최초의 것'이라는 의미로 제사에 있어서 전체 큰 덩이에서 일부를 떼어 내어서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이것은 민15:17-21에 나오는 거제의 규례에서 온 것으로 떼어낸 부분이 원덩이를 대표한다는 개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곡식인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다. (2)거룩성을 나타낸다. 첫 열매가 전체 떡덩이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이다(Barmby). 결국 이스라엘과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조상들이 거룩했으니 남은 그의 자손들도 거룩하다는 의미이다.

(로마서 11:17)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돌 감람나무는 야생 감람나무로서 (1)원래부터 돌감람나무 종류가 있고, (2)원래는 좋은 감람나무였으나 주인의 손질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있다. 통상적으로 감람나무를 접붙이는 방법은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이를 거꾸로 비유한다. 이처럼 참감람나무의 가지 일부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였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이 원가지가 아님을 명백히 한다. 아마도 바울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의 뿌리에 연결되어 좋은 진액을 받아 품질이 낫게 변화되는 것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Murray). 이러한 접붙임으로 원가지와는 전혀 무관하던 돌감람나무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로마서 11:17)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이방 그리스도인도 이스라엘 족장이 누렸던 구속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요한 것은 진액이라기 보다는 그 뿌리이다. 즉 이스라엘과 무관했던 이방인이 참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12족장과 맺은 구원의 언약과 연관된다(Hendriksen, Lenski). '참감람나무'는 16절의 '처음 익은 곡식'과 통하는 것으로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모든 혜택의 근원을 상징한다. 이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유대인들의 일부가 구원의 길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들을 향해 우월감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다고 충고한다. 여기서의 '가지'는 꺾여진 가지로 원가지에서 벗어난 유대인을 말한다(Murray, 19,20,22,24절). 이방 그리스도인은 이들에 대해 자긍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긍(*카타카우코)이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높이며 자랑한다는 뜻이다. 당시 로마 교회의 구성원 중 일부가 영적 자만심을 가지고 동료 유대인 신자들을 업신여기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원가지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긍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로마서 11:18)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자만심에 빠져 유대인이 원가지에서 꺾여졌다고 주장해도 자신들이 뿌리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가지들을 지탱시켜 주고 가지들에게 생명을 유지하게하는 뿌리와도 같기 때문이다(Calvin). 여기서 강조된 '너'(*쉬)가 단수형으로 쓰여 마치 개인을 대상으로 구원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울은 교회에서의 이방적 요소를 하나의 단위로 다루고 있는 것 뿐이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복음 거부로 인해 이방인 교회가 탁월한 위치에 있게 됨을 가리킨다(Harrison). 그러나 바울은 이것으로 인해 교만과 자만심을 갖게 하지 않도록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기원을 생각하도록 한다.

(로마서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는 '꺾이운 가지'와 '접붙임을 받은 나'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Murray, Dunn).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예증은 이방인들을 교만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려는 것이다(Calvin).

(로마서 11:20) 옳도다.

 이에 해당하는 '칼로스'는 '바로 그렇다', '맞다'의 뜻으로 앞절의 내용을 시인하는 것이다. 구속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보장되었던 것이 이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유동적으로 적용됨으로 인한 구원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긴장을 보충 설명하려는 것이다(Dunn).

(로마서 11:20)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유대인이 버림을 받은 것은 불신 때문이고, 이방인이 접붙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다. '믿지 아니하므로'(*테 아피스티아)와 '믿음으로'(*테 피스테이)가 모두 여격으로 쓰여져 이유, 수단, 원인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인해 두 가지 상반되는 현상이 나타났을 뿐임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은 불신으로(9:30-32; 10:3,16)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자리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이방인은 서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빋음 때문이다. '믿으므로'가 강조된 것은 견고히 서있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믿음인 것을 보여준다.

(로마서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헬라어 본문에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있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자긍하지 말아야 할 두번째 이유를 제시한다. '우너 가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신 클라돈'은 본래 자연적으로 생성된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얻은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이어야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고 원뿌리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서 11:21)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흠정역(KJV)에는 '너도 남기지 아니하실까 유의하라'로 되어 있다. '유의하라'(take heed)는 표현은 공인 본문(TR)에 의거해서 번역했다. 공인본문에 의하면 이 구절 앞에 '메 포스'(하지 않을까)가 있다. 흠정역(KJV)은 이를 따라 20절의 '두려워 하라'와 연결시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 가지도 믿음을 떠났을 때 꺾어 버렸는데 접붙여진 가지가 믿음을 버렸을 때 남겨둘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11:22)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

 이는 하나님의 품성 안에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실패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위를 경험하고 있지만,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얻은 이방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누리고 있다(Harrison). '인자'의 헬라어 '크레스토테스'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한다(2:4). 한편 이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엄위가 제시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근거한 것이다(Murray).

(로마서 11:22)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넘어지는'의 헬라어 '페손타스'는 부정과거로 쓰여 완전히 넘어져 믿음에서 타락했음을 의미한다(14:4; 고전10:12; 히4:11).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심판을 행할 때, 조금도 주저않고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약속의 백성마저도 제하여 버리는 엄위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1:22)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헬라어 본문에서는 접속사 '데'(그러나)가 있어서 앞 문장과 연관되어 있다. 앞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엄위를 말하나 이제는 인자에 거할 것을 권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불신앙으로 인해 계속되며,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반응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서 11: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본절에서 24절까지 이스라엘이 회복될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전에 그들이 원 나무에서 잘리운 이유는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회복은 오직 믿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접붙임 입는 조건이다.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는 그 대상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변덕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응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Harrison).

(로마서 11:23)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본 구절에서는 일반적인 원예 상식을 벗어난 특수한 경우를 언급하는데, 바로 꺾여진 가지를 다시 접붙인다는 것이다. 일단 꺾여진 가지는 재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불가능한 예화를 사용하여 유대인의 회복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문자 구조상으로도 잘 나타나는데, '능력'에 해당하는 '뒤나토스'가 문장 첫머리에 나온다. 구약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깁보르'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세운 언약에 신실하다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느9:32; 사10:21; 렘32:18).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이방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로마서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이방인이 구원얻게 된 사실을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요약 정리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가능한 일임을 논증하고 있다. '우너 돌감람나무'의 '원'과 '본성'의 헬라어 '퓌신'(자연적인)은 전치사 '카타'(...따라, ...로부터)와 '파라'(...거스려)와 함께 쓰여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대조는 접붙이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게 아니라, 다른 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성공적으로 접붙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Dunn). 따라서 이러한 재접목은 이스라엘 대신 이방인만을 은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유대인도 이방인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로마서 11:24)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유대인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일종의 예정된 조화(pre - established harmony)라고 하는 본질적인 유사성이 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유대인들의 회복이 성취될 터인데 이는 이방인의 동참보다 쉬워질 것이다(Godet). '얼마나 더'의 헬라어 '포소말론'은 문맥상 '얼마나 더 쉽겠는가'(How much more easily)라는 의미임이 확실하다. 하나님은 유대 족이나 이방 민족이나 상관없이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자를 자녀로 삼아주신다(요6:40).

(로마서 11:25) 형제들아.

 이에 대하여는 1:13주석을 참조하라.

(로마서 11:25)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에테 파르 헤아우토이스 프로니모이'(너희 스스로를 너희가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도록 하려고) 가운데 전치사 '파라'(...곁에, ...함께, ...로 말미암아)가 어떤 사본에는 '엔'(...안에, ...로)으로 되어 있다(A,B). 그런데 비교적 오래된 사본에서는 전치사 '파라'로 되어 있으며(N,C,D) 바울은 12:16엥서도 이 말을 사용하는데, 거기서도 '파라'로 되어 있어서 '파라'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한편 본 구절의 '히나 메 에테'가 현재 가정법으로서 목적절이 되므로 바울이 이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방인들이 자만해 있는 것을 막고 유대인들에 대해 스스로 높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Calvin, Robertson). 이는 그들이 그들 안에서부터 스스로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로마서 11:25)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바울 당시에는 밀교(密敎, Mystery religion)가 있었는데, 그들은 입교자 외에는 알려주지 않는 비밀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정도 단계가 지나지 않으면 이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Davidson, Martion). 그러나 신약에서 사용되는 '비밀'(*뮈스테리온)이란 이처럼 종교적 호기심을 발동하게 하거나 특별한 사람이나 풀 수 있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그의 백성에게 알려지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활동을 의미한다(Harrison). 이 말은 계시에 대해(고전2:7; 엡3:3,4,9; 딤전3:16),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골1:26-28),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고전2:6,7,엡3:3-6)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이는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비밀이지만 ,이제는 그 비밀이 알려졌다(16:25,26; 고전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비밀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사람이 완악하여졌거나 마음이 어두워져서 개별적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1: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이스라엘의 충만함(12절)이나 이스라엘을 받아들이는 것(15절)과 연관되어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확대되었음을 시사한다. '충만한 수'에 대해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고 한다거나(공동번역), 구원얻을 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논리를 여기에 도입시켜버리는 것은 바울의 정신을 오해하고 본 구절이 다루고자 하는 핵심을 흐려지게 할 뿐이다. 이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 증거되기 위해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는 종말 현상에 대한 예수의 말씀(마24:14, 막13:10)에 근거한 것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며(Godet) 선택된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말하는 것이다(Meyer).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적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계속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역사의 끝이 되면 이러한 완악함도 끝날 것이다.

(로마서 11:25)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우둔하게됐다'는 표현은 7절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17절의 비유에서는 '가지 얼마가 꺾여졌다'고 암시되었다. 본절에서는 '더러는'이라는 표현이 추가되었다. 이 '더러'(*메루스)라는 낱말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1)칼빈(Calvin)은 이것이 단순히 시간이나 숫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정도'(measure)의 의미로서 듣기좋게 수식하려 했을 뿐이라고 한다. (2)혹자는 이것을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시간적으로 충만한 숫자가 들어오는 기간동안만 제한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라 한다(Godet, Harrison). 그러나 본 구절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언제 완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 계획이므로 알 수 없다. 결국 칼빈의 견해대로 바울은 본 구절에서 숫자나 시간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우둔게 된 것은 이방인이 구원얻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고, 결국 이스라엘도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마서 11:26)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온 이스라엘'이 역사의 끝에서 지구상에 살고 있을 모든 유대인 집단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Barmby). 그러나 이 견해는 구원의 대상이 사람의 혈통에 의해 좌우된다는 결과가 되므로 성경적으로 지지받지 못한다. (2)혹자는 갈6:16에 근거하여 '온 이스라엘'이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하였다(Augustine, Theodoret, Luther, Calvin). 그러나 본문의 문맥상 구원받은 이스라엘이라는 견해는 타당하지만,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즉 상반절에서 묘사된 '온 이스라엘'과 '남은 자'의 대조를 파악할 수가 없다(Harrison). (3)어떤 학자들은 선택된 유대인 전체로 본다(Robertson, Lenski, Murray). 이 견해대로 하면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라는 구절이나 26-29절에 이어지는 문맥과 잘 연결된다. 즉 본절의 '온 이스라엘'은 장차 구원받게 될 이스라엘 민족 개개인을 말한다. 본 구절이 주는 어감은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을 암시해 주지만, 모든 개개인이 구원얻는다기보다는 상당히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돌이킨다는 의미로 봄이 타당할 듯하다.

(로마서 11:26)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본 구절은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바울 자신의 견해를 강조하기 위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린 것으로서 사59:20, 21을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바울의 인용을 70인역(LXX), 맛소라 본문(MT)와 비교할 수 있도록 아래와 같이 대조표를 만들어 보면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시온'이란 단어를 지배하는 전치사이다(개역성경은 번역상에서 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본문 혀세이 에크 시온 호 뤼오메노스 '그 구원자가 시온으로부터 올 것이다'(개역)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MT 사59:20 우바 레치욘 고엘 '또 구속자가 시온을 향하여 올 것이다'(개역)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LXX 사59:20 혀세이 헤네켄 시온 호 뤼오메노스 '그 구원자가 시온을 위하여 올 것이다' 바울이 쓴 본문에서는 전치사가 '에크'(...로부터<from>)로 되어 있고, 70인역에서는 '헤네켄'(...을 위하여<for the sake of>)으로, 맛소라 본문에서는 '례'(...으로<to>)로 되어 있다. 이런 차이들은 각기 성경 기자의 신학점 관점에 따라 기록한 것일 뿐 내용상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바울의 관점을 살펴본다면 본문에서 전치사를 '에크'로 바꾼 이유는 이스라엘의 회심으로 인해 메시야가 강림할 때 천상의 예루살렘으로부터 오실 것(갈4:26; 히12:22)으로 간주했기 때문인 것 같다(harrison). 한편 '구원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뤼오메노스'는 히브리어 '고엘'의 번역이며 이는 종이된 다른 사람을 종된 상태로부터 구해주거나 채무를 대신 짊어지는 사람을 가리킨다(룻3:12; 욥19:25). 특히 이 말은 민족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내는 '구속자', 즉 '메시야'를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야곱' 곧 이스라엘 가운데 불경건한 것들이 척결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로마서 11:26)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본 구절은 70인역의 사59:20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구약에서 '야곱'(*야코브)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집합적이고 대표성을 가진 용어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전반적으로 범죄하여 경건치 않게 되었는데 이렇듯 불경건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70인역(LXX)과 맛소라 본문(MT)을 비교하면, 바울이 70인역의 번역을 따른 것이 분명해진다(다음 도표 참조). 본문 '아포스트려세이 아세베이아스 아포 야코브'는 '야곱으로부터 불경건함을 그가 돌이킬 것이다' (개역)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MT 사59:20 울르솨베 페솨 베야아코브 '그리고야곱 가운데 죄를 돌이키는 자에게' (개역) (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LXX 사59:20 카이 아포스트려세이 아세베이아스 아포 야코브 '또 야곱으로부터 불경건함을 그가 돌이킬 것이다' 맛소라 본무넹 의하면 그 죄에서 떠나는 자에게 구속주가 왔다고 한 반면, 70인역에서는 구속주가 와서 백성으로 하여금 불경건함에서 돌이키게 할 것이라고 번역하였다. 바울이 70인역의 번역을 그대로 따른 것은 70인역이 구속주가 반드시 와야 죄가 해결될 것을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구속주로 인해 은혜를 입으 자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점의 차이는 있어도 두 번역은 동일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로마서 11:27 본 구절은 사27:9의 인용이다. 바울은 이 구절을 자유롭게 고쳐서 인용했으며 여기에는 렘31:31-34과 미5:2 등에서 볼 수 있는 사상도 깃들어 있다(Harrison).

(로마서 11:27)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때 얻게 되는 복스러운 은혜를 말하고 있다. 바울의 인용과 구약 본문이 차이를 보이는 부분을 비교해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본문 호탄 아펠로마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아우톤 '내가 그들의 죄들을 떼어내줄 때에'(개역)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MT 사27:9 브제 콜 프리 하시르 해타토 '또 이것이 그의 죄를 돌이킨 모든 결과(이다)' (개역) (그 죄를 없이 함을 얻을 결과는) LXX 사27:9 호탄 아펠로마이 아우투 텐 하마르티안 '내가 그의 죄를 떼어내 줄 때에' 본 구절 역시 70인역의 번역을 따랏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지 못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회심이 어려운 이유는 그 백성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70인역은 새로운 언약을 통해 저희 죄를 값없이 처리해 주겠다고 선언한 데 강조점을 두었다.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사27:9의 예언을 보면, 여러 우상이 진멸될 때 비로소 야곱의 불의와 죄가 속함을 받은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약속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70인역의 번역을 따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성된 구원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죄들)는 70인역에는 단수(*하마르티안)로 되어있으나 복수로 고쳐 인용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개개인이 범한 모든 죄악을 총칭하고 공동체 전체가 범한 죄 모두를 강하게 시사하는 표현이다.

(로마서 11:27)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이러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새언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새 언약은 렘31:31에서제시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옛언약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행되어 하나님의 법이 백성들 속에서 작용하고 마음에 기록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완악하여지긴 했어도 대부분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될 것임을 제시한다. 결국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한 언약의 개념이 보다 구체화되어 계속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Dunn). 한편 구약의 본문과 바울의 인용을 비교하면 아래의 도표와 같다. 

 본절에서 '언약'(*디아데케; *브리티)을 수식하는 전치사구가 맛소라 본문과 다르다. 바울은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여기서 언약을 수식하는 전치사구는 '나에게로 말미암은'(*파르 에무)이고, 맛소라 본문에서는 '그들과 함께'(*오탐)이다. 구약 본문에서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은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헬라어 본문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언약'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시사하고 또한 그 언약이 새언약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로마서 11:28 본절에서 바울은 수수께끼같은 이스라엘의 현재적 상태를 하나님의 구원 섭리라는 포괄적인 관점에서 경구적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복음'과 '택하심'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비롯되는 이스라엘의 이중적 상태를 역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본절에는 대조와 병행을 이루는 용어들이 부각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수'와 '사랑을 입은 자', 그리고 '복음'과 '택하심'이다. 한편 4:25에서도 이와 같은 수사법을 사용하였는데(Kasemann). 본절에서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유대인의 불순종과 패역은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천대받아도 된다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Calvin).

(로마서 11: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여 실제로는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지만, 이로인해 이방 세계에 복음이 전해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해지는 계기가 되었으므로(Bruce) 그 효과는 충분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던 유대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였어도, 하나님의 택하심과 전혀 무관했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적대 관계가 형성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된 것처럼 보여도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가진 것과 다른 특권을 고유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하고 있다.

(로마서 11:28)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비록 복음의 경륜 안에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위해 우너수도니 자로 간주되었지만 그들의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어왔다는 것이다(Harrison). 그러나 '조상들을 인하여'(*디아 투스 파테라스)라는 구절은 조상들의 공적(*제쿠트 아보트)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Bruce). 즉 조상들이 보여 준 의롱누 행위가 축적되어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사랑을 입은 것은 그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는 것이고(Kasemann, Dunn).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신실하게 언약을 성취해 가심으로 그 후손들에게도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실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이 폐기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은사와 부르심'(*타 카리스마타 카이 헤 클레시스)에 대한 해석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1)혹자는 두 개의 다른 범주라 하고(Cranfield) (2)혹자는 바울이 부르심을 가장 중요한 은사로 여겨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Michel). 이 견해대로 하면 '은사와 부르심'은 '은사, 그 중에서도 부르심'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3)가장 유력한 견해는 이것을 증언법(hendiadys)으로 보는 견해로서(Calvin, Kasenmann). 이 견해에 의하면 '은사와 부르심'을 '부르심의 은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세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할 듯하다. 한편 이러한 은사는 9:4,5에서 언급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말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부르심의 은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유일한 위치로 부르셨다는 점을 증거해 준다(Harrison).

(로마서 11:29)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메타켈레타'가 헬라어 본문에서는 문장의 첫머리에 와서 강조되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후회라고 하는 것을 결코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한 표현이 몇군데 나타나는데(창6:6; 민23:19; 삼상15:11,29), 하나님의 '후회하심'(*나함)이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여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심히 유감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번 정하신 뜻을 돌이키거나 변심하지 않으시며, 실수하시는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달리 신적 불변성(immutability)을 갖고 계신다.

(로마서 11: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너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메이스'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 어떠했다라고 독자들의 과거 상태를 지적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돌이키는 실수를 범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불순종으로 인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게 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톤'(이들의)은 소유격으로서 '순종치 아니함'(*테 아페이데이아)이라는 여격 분사의 의미상 주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는 '이들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불순종한 것을 이용해서', '이들의 불순종을 통하여'(표준신약전서), '그들의 불순종의 결과로서'(as a resul of their disobedience, NIV),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because of their disobedience; 공동번역, RSV) 등으로 번역된다.

(로마서 11:30)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절과 다음 절에 나오는 '이제'(*뉜)는 역사적인 현재를 나타낸다. '긍휼'(*엘레오스)은 사람의 이성으로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지혜요 경륜이다. 이 긍휼을 베푸심의 근거는 '순종치 아니함'이며 이는 32절까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긍휼함을 얻는 대상 역시 28절의 도표(구원의 대상의 순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대인 → 이방인 → 모든사람'이라는 논리적 순서를 따른다. 이러한 논리적 과정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1)마치(*호스페르) 30절 이방인의 불순종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 이방인이 긍휼함을 얻음 (2)이와 같이(*후토스) 31절 이스라엘의 불순종 이방인에게 베푸신 긍휼로 → 이스라엘이 긍휼함을 얻음 (3)왜냐하면(*가르) 32절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어 두심 → 모든 사람이 긍휼함을 얻음 위에서 각 문장들은 접속 부사와 함께 쓰였는데, (1)과 (2)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예시한 것이고 (3)은 불순종과 긍휼을 교차시키는 궁극적인 목적을 기술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은 종말론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서 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더니...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앞 문장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바울은 다시 한 번 이방인들에게 은혜 안에 있는 그들의 현 위치에 관해 우쭐대지 않도록 하려고 이방인들이든지 유대인들이든지 어떤 특권이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비록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악화되어도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계속 베푸신다(Harrison).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이 긍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니...베풀려 하심이로다.

 본절은 헬라어 본문에서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되어 30,31절의 결론이 되고 있으며, 5:12-21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내용을 매우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인간을 긍휼히 여기심이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본서의 전체적인 주제를 상기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버려두신 것은 그들의 화인맞은 양심(딤전4:2)이 각성되어 자신들의 절망적인 상태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궁극적 목적을 위해 이방인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도구로,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이방인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는 결국 구원의 전체성, 즉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만인 구원을 인정하는 구절은 아니다(25,26절). 본절의 '모든 사람'은 그 범위가 제한된다. 즉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사람', '긍휼을 얻을 모든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루투 카이 소피아스 카이 그노세오스'를 직역하면 '부요와 지혜와 지식'(the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이라 할 수 있다(공동번역, RSV).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오히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the riches of the wisdom and knowledge)이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KJV, NIV, NASB). 왜냐하면 '부요함'과는 달리 지식과 지혜는 명확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Lenski). 즉 '지혜'(*소피아스)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종합적 통찰이며, '지식'(*그노세오스)은 단편적, 감각적 사물에 대한 인식이다. 본절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이고 지식은 그 원리를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지적 능력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계획과 구속 경륜이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다.

(로마서 11:33)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앞 구절에서 언급한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다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판단'(*크리마타)이란 '정죄'나 '심판'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결정'을 의미한다(Lenski, Hendriksen). 또한 '길'(*호도이)은 '하나님의 작정하심이나 행하심, 다스리심'과 연관되는데,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이 인생들에게는 측정이 불가능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신 것외에는 알 수도 없지만, 알려고 하면 미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Calvin). 혹자의 말대로 하나님의 판단과 길은 길은 깊은 우물과 같아서 아무리 그물을 퍼 올려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로마서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본절부터는 세 가지 질문 형태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본절은 70인역의 사40:13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는 앞 구절과 연결시켜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를 첨가하였다. 또한 앞 구절(33절)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로 되어 있었지만 여기서는 의문형을 취하였다. 본문 티스 가르 에그노 눈 퀴리우 '그러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는가?' (개역)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MT 사40:13 미 파겐 여 루아흐 야웨 '누가 여호와의 신(神)을 측정해냈는가?' Who has meted out the Spirit of Jehovah(J.P. Green, Sr.) (개역)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LXX 사40:13 티스 에그노 눈 퀴리우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는가' 

(로마서 11:34)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두번째 질문으로 앞구절과 마찬가지로 사40:13의 인용이며, 앞 구절과의 연관성 때문에 접속사 '카이'(또한) 대신에 접속사 '에'(또는)가 사용되었다. 본문 에 티스 쉼불로스 에게네토 '또는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는가?' (개역)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MT 사40:13 브이쉬 아차토 요디엔누 '또한 어떤 사람이 그의 모사로서 그를 가르쳤는가?' or a man His counsel taught him?(J.P. Green, Sr). (개역)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LXX 사40:13 카이 티스 아우투 쉼불로스 에게네토 '또한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는가? '하나님은 스스로 뛰어난 모사이시기 때문에 어떤 모사가 필요없고, 오히려 그의 백성들에게 모사가 되어주시는 전지 전능의 존재이시다(욥36:22,23). 어떠한 유한자도 무한자를 파악하지 못한다(Finitum non cap ax infiniti est, '유한은 무한을 파악하지 못한다'). 따라서 주께서 보여 주시는 부분만을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서(Condescensio Dei, '하나님의 낮아지심') 계시하신 사실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로마서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본 구절은 세번째 질문으로 욥 41:11의 인용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고 그것들에게 모든 가치와 역할과 원리들을 나누어 주셨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 대가로 하나님이 축복을 주신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만유의 근원이 되시며 만상의 조성자(造成者)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운행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시므로 받으실 필요가 없다.

로마서 11:36 바울은 만물의 시작과 과정과 끝,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만물의 근원이시며 집행자이시며 목적이신 하나님에게로 귀속시키고 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자는 결국 모든 지혜의 근본을 깨달은 자와 다름없다(잠1:7).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세 가지 질문 형태의 찬양에 이어서 하나님은 만물의근원이시며, 그 생성발전의 주관자이시며, 그 종국적 목적이심을 선언적으로 고백한다(고후5:18; 엡1:23; 골1:16; 히2:10). 이 문장은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문이었는데, 여기에는 삼위 일체론적인 송영이 감추어져 있다(Davidson, Martin). 

(로마서 11:36)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세세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는 '그 영원함까지'라는 의미이며, 16:27에서도 이 같은 송영으로 로마서를 끝마치고 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본절이 1-11장의 교리 부분의 대단원이 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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