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2장 성경강해

2024. 2. 20. 07:57구약 BIBLE/마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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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흐름정리>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중풍 병자 치유 사건을 통해서 죄사함의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인류의 근원적인 질병(죄)을 고치시는 구속자이셨다. 후반부에 나오는 금식과 안식일 논쟁은 의식과 전통보다는 인간과 그 내면 상태를 중시하는 주님의 태도를 나타낸다. 특히 주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 천명하심은 인자의 권세가 하나님과 하나이며 당신이 모든 사물과 제도의 근원임을 나타내신 것이다.

 

<마가복음 2장 줄거리>

1. 그리스도가 한 중풍병자를 고침.

14.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부름.

15.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음.

18. 그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음.

23.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름에 대하여 변호함.

 

<마가복음 2장 개역개정>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2장 성경주석>

(마가복음 2:1) 수 일 후에(*디 헤메론).

이는 정확한 날들의 수를 지시하는 말이기 보다 오히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셨을 때와 돌아오셨을 때 사이의 빈 기간을지칭하는 표현이다.

(마가복음 2:1) 다시 가버나움에...소문이 들린지라.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신 뒤에 갈릴리의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셨다. 앞서 이야기된 바에 따르면(1:21)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것은 갈릴리에서의 선교 활동을 위해서였으나 치유받은 문둥병자의 인간적인 열성에 의해 잠시 그곳을 떠나셨다가 다시 팔레스틴 북쪽 지역, 특히 갈릴리 사역의 활동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에 돌아오신 것이다. 한편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간혹 '다시', 즉 헬라어로 '파린'(*)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미 보도한 상황과 지금부터 전개될 상황과의 긴밀한 연관성을(13절;3:1, 20;4:1;5:21;7:14, 31) 보여주려는데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난 '집'은 1:29에 나타난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예수께서 마을에 들어 오시자 그 소문은 곧 인근 각처에 퍼지게 되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진다는 것은 마가의 전형적인 표현이다(3:8, 21;5:27).

(마가복음 2:2) 많은 사람이 모여서...도를 말씀하시더니.

1:33에서 이미 주어진 인상이 보다 확대된다. 즉 예수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한번 만나보기 위해 베드로의 집 앞에 인산 인해(人山人海)를 이뤘던 것이다. 이러한 장면에 대해 특별히 마가는 그집 문 주변이 거의 통행 불능 상태에 이르렀음을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더욱 현장감있게 묘사했다. 한편 예수는 이런 상황에 처하여 그들이 기대하는 바 이적을 행치 않으시고 오직 천국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셨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께서 말을 전하심에 관해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도(*, 톤 로곤)를 말씀하시더니'라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마가는 4:14-20에서도 다시 한 번 구체적인 설명 없이 '말씀'을 전하신 것을 담백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도'(道)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가 ? 성경에서는 흔히 이 말이 '구원의 메시지', '복된소식', '복음'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Lane),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비밀'(thesecret of the Kingdom, 4:11)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기에 영합한 일시적 문제 해결로서의 이적을 행치 않으시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참생명의 진리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마가복음 2:3)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중풍(paralysis)은 뇌일혈(cerebralhemorrhage) 등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나 반신 또는 몸 전체가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병이다. 그래서 중풍 환자는 말하는 것을 물론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없었기에 타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여기 등장하는 '네 사람'에 대해 그 환자의 친구인 상전의 명령을 받은 종들로 보는 견해도 있고, 또 그환자의 가족이나 친구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쨋든 이 네 사람은 그 환자를 위해 아낌 없는 헌신을 다하는 참된 의미의 동료요 형제요 친구였다. 누가의 보고에 따르면 이때 네 사람은 환자를 침상에 뉘고 그 침상의 네 모퉁이를 네 사람이 메고 왔음을 곧 알 수 있다(눅 5:18). 실로 침상을 운반하는 일에 적극 동참한 자들의 예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협력과 진취적 노력및 아름다운 협동은 그리스도께 넉넉히 인정받을 만한 것이었다.

(마가복음 2: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헌신적인 4명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병자가 예수께서 계신 집에 당도했으나 수많은 군중들이 입추(立秋)의 여지도 없이 그 문 앞에 둘러서 있었기 때문에 정작 만나 뵈어야 할 예수께는 도무지 다다를 수가 없었다.

(마가복음 2:4)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달아 내리니.

4명의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최선을 다했다. 결국 그들은 우회하는 방법이지만 가장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즉 바깥 계단을 통해서 지붕 위로 환자를 메고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가 있는 곳으로 환자를 달아내렸다. 한편 팔레스틴의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형태이다. 그리고 바깥은 지붕으로 계단이 놓여 있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붕은 보통 나무로 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어 그 위에 놓고 그 사이를 흙으로 채워 비를 막도록 되어있다. 가끔 들보 위에 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짚과 흙으로 덮기도 했다(2:1-28 주제 강해 '예수 당시의 서민 가옥 구조' 참조). 따라서 중풍병자를 지붕 위로 올려 온 사람들은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 석회, 판자, 기와 등을 떼어내고(이때 분명히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막 드러난 들보(the now exposed beams) 안으로 그환자를 달아내렸을 것이다. 한편 본문의 '상'(*, 크라밭톤)은 일반 서민들의 짚으로 만든 자리나 담요 같은 누울 것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2:5)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기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현명함과 또 열심있는 믿음을 보셨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란 단지 침구를 메고 온 4명의 동료만이 아니라 중풍병자까지를 포함한 5명을 함께 지칭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Cranfield, Robertson). 사실 본 사건을 통해 중풍병자의 믿음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예수께서 바로 그 환자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2:5)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는 환자의 병을 고쳐 주는 대신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우리는 여기서 그 환자가 필요로 했던 바가 죄의 용서가 아니라 바로 중풍병의 치료였다고 피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 환자가 어떤 특별한 죄를 지었던 것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환자의 경우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고 또한 모든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기인되었다는(사 59:1, 2) 구약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진리가 예증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예수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병을 고쳐 증거할지라도 이는 또 하나의 뚜렷한 이적에 관한 내용으로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Schweizer). 어쨌든 예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러 온 자에게 영혼의 죄까지 사해 주신 사실을 통해 (1) 육신의 병고침은 한시적(限時的)인 것이지만 영혼의 죄사함은 영원하며, (2) 육신의 질병이 직접적인죄의 결과는 아니지만 인류 최초 범죄 이후 병과 죽음이 시작되었다는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육신의 질병보다 그 본질적인 원인인 죄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며, (3) 전자는 부분적이요 조건적이고 후자는 전체적이요 절대적이고, (4) 전자는 인간의 방법으로도 가능할지 모르나 후자는 오직 예수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본문의 '소자야'(*, 테크논)란 말은 흔히 랍비들이 제자들을 향해 쓰는호칭인 동시에 친근한 손아래 사람에게 칭하던 매우 부드럽고 따사로운 호칭이다(마9:2).

(마가복음 2:6) 서기관들이...마음에 생각하기를.

저자 마가는 이미 1:22에서 '서기관들'을 언급한 바 있다. 눅 5:17에서는 그들이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온 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즉 그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예수를 어떻게든 책(責)잡기 위해서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군중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고 앉아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 마음은 예리한 칼날같이 모든 상황을 점검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죄 사함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마가복음 2:7) 이 사람이...신성모독이로다.

전통주의적이요 사변적인 비평가들의 판단은 명백하게 옳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속성과 메시야의 특질이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야조차도 죄를 사할 수 없었고 오직 야웨 한 분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그들은 야웨와 메시야의 일체성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은 이 땅에 메시야로 강림하신 예수께서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인 하나님의 아들(聖子)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위일체 중 한 위격이 행하시는 바는 다른 두 위격이 행하시는 바와 함께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서로가 매우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세 위격은 홀로 또는 서로가 독특한 일을 행동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세 위격은 한 분이신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세위격 중 어떤 한 위격이 행하는 바는 불가분적으로 다른 두 위격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창 1:1, 2을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성령, 두 위격이 창조 역사를 주도하신 것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창 1:3 및 요 1:3에 비추어 볼때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자 예수에 의해서도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아니다. 이 내용은 단순히 삼위일체의 각각 다른 위격의 입장에서 형성된 진리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사죄의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과 구별되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聖父)의 능력으로 그렇게 행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온전히 거룩하셨다. 그러나 그의 거룩한 본성은 그가 자원함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요 1:14;빌 2:5-8;요일 4:2, 3) 인간 본성의 한계 내에서 국한되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께서 행하셨던 능력있는 사역은 그를 통해서 일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NIV,Disciple's Bible).

(마가복음 2:7) 신성모독이로다(*블라스페메이).

이 말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주제넘고 건방지며 사악하게 타인을 비방, 중상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의 특권을 탈취하거나 그분을 불경스럽게 모독한다는 뜻이다. 한편 율법(레 24:16)에서는 참람 죄를 범한 사람은 예외없이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 있다. 사실, 후에 스데반은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게 된다(행 7:54-60). 따라서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갈릴리 목수 출신에 불과한 예수의 사죄 선포는 분명 참람한(blasphemous)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이 생각한 대로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인간 예수에 불과했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았을 것이다. 실로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움에 거하던 자들로서 진리의 빛이 그들에게 비춰졌지만 감히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불행에 처하고 말았다(요 1:5).

(마가복음 2:8)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곧 중심에 아시고.

서기관들은 예수의 행동에 관한 그들의 오해를 겉으로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마가는 단지 '그들은 마음에 의논하였다'고 했다. 실로 그들의 마음의 표정은 얼굴과 분위기로써 넉넉히 표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내면의 요동을 '중심에 아시고', 즉 '당신의 영으로 감지(感知)하시고'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셨다(마 9:4;눅 5:22). 이처럼 예수께서 그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은 분명 직관적으로 상대의 심령을 읽어내시는 당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연유한 것으로서, 이러한 사실은 현재의 그리스도론적 사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이시며(롬 9:14;빌 2:6;딛 2:13)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신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계 19:16)로서 전능하시며(마 28:18) 전지하시고(요 1:48) 무소 부재하신(마 18:20) 신적 속성을 지니셨으며, 창조(요 1:3)와 보존(골 1:17), 죄의 용서(눅 7:48)와 심판(요 5:27)의 신적 사역 및 성령을 보내시고(요 15:26)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요 5:25) 완전한 신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와 함께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마11:27;요 17:1),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여기셨다(요 5:18, 21;12:44, 45) 따라서 학자들은 이것을 신적 인간 개념(*, conception, 데이오스-아네르-컨셉숀)과 결부시켰다. 즉,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표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인간이어야 했으며, 구속자가 되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나님이어야 했다. 참 신성과 참 인성을 동시에 가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며 하나님이었으나 통일된 인격을 가지셨다. 한편 이러한 신적 능력을 행하시는 행위자에 관해서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그분의 신적 탁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고(왕상 8:39),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삼상 16:7;시 7:9;렘 11:20)분, 그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마가복음 2:9) 중풍병자에게...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단지 구두(口頭)로써의 사죄 선언과 현상적으로써의 완전한 치유 이적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는 질문으로 그들의 답변을 구하셨다. 물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로는, 그 질문중 어느 것도 더 쉽다고 답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모두가 똑같이 불가능한 일이며,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쉬운 일이다. 아마도 서기관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죄 사함의 성취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죄 사함에 관한 말이 더 쉽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실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더 어렵게생각되었을 것이다.

(마가복음 2:10) 인자가 땅에서...알게 하려 하노라.

서기관들은 9절에서 예수께서 제시한 선택적 질문에 어느 한 쪽도 무책임하게 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쪽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먼저 인간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신(神)의 관점에서 더 어려운 편, 곧 그들이 볼 수 없었던 죄 사함을 선택하셨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가 실제로 죄를 사하는 권위와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 죄를 사하는 권리와 권능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행사하신다(Robertson).

(마가복음 2:10) 인자(*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로서 그리스도께서 즐겨 사용하신 자기 자신에 대한 메시야적 명칭이자 타인으로부터 쉽게 공격을 받지 않는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표현이다(눅 5:24 주제 강해 '인자'참조). 즉 '인자'란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수의 모습(identity)은 물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위(authority)와도 관련되어 있다. 한편 이 용어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마가가 즐겨 사용한 메시야 칭호이다. 그런데 이 호칭은 구약성경과 경외전(經外典)인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黙示文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용어로서, 특히 구약에서는 주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8:4;겔 2:1, 3, 6, 8;단7:13, 14). 그리고 묵시 문학에서는 주로 여호와의 날 곧 종말에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이 땅에 심판주로 임하실 메시야라는 뜻으로 전달되고 있다(Taylor, Grant).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제시하는 바 이 '인자' 개념은 주로 심판주로서의 메시야란 의미와더불어 이 세상의 죄인을 지금 용납하시고 그 죄를 지금 사유(赦宥)하시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으로서의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다(2:28;14:62). 즉 그분은 심판의 시점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직권(職權)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Robertson).

(마가복음 2:10) 중풍변자에게 말씀하시되.

이 구절의 첫 부분은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통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라는 부분은 이제 서기관들이 아니라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삽입구가 된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의 대상이 바뀌는 자연스럽지 못한 상황이 발생된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 설명이 옳은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아마도 어떤 몸의 동작 변화로 이야기의 대상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편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본 사건의 종합적인 상황을 알고 있던 저자 마가가 상황의 급격스런 변화라는 어색한 표현 기법을 사용해서라도 독자들에게 본 사건의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위와 같이 진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말한 자연스럽지 못한 문제로 해결이 된다(Wessel).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서기관들의 태도에는 관심이 없었고 중풍병자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마가복음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소이 레고).

이는 예수가 지니신 신적 권위를 대변하는 말이다(마 5:22, 28). 즉 이는 의학적 기술이나 귀신들의 힘을 빌리는무술적(巫術的) 치유와는 달리 예수 자신이 죄의 결과인 질병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심을 공언하시는 절대 권위자로서의 선언이다.

(마가복음 2:11) 일어나...집으로 가라.

동료 4명의 도움에 의해 들것에 실려왔던 그 환자에 대한 완전한 치료를 선언하시는 3중적 명령(일어나, 가지고, 가라)이다. 실로 예수의 권위에 찬 명령은 그 자체 내에 역동적 능력이 있어 그 명령하신 바가 그대로 성취되도록 한다(12절). 한편 이러한 완전한 치료는 바로 죄 사함을 입증했다. 예수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분명히 병 고침이 일어난 것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의 결과로 이제 죄 사함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헌터(Hunter)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이 볼 수 없는 다른 일도 자신이 행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볼 수 있는 이적을 또한 베푸셨다.'

(마가복음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중풍병자에게는 '곧'(*, 유뒤스) 반응이 일어났다. 실로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특히 '모든 사람앞에서', 즉 모든 무리와 죄를 사하시는 예수의 권위에 대항했던 서기관들 앞에서 그는 일어나 상을 가지고 나갔다. 이에 대해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먼저는 상이 그를 들고 왔으나 이제는 그가 상을 들고 간다'는 말로써 엄청난 그 변화를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로써 예수는 서기관들에게 항변 없이도 그들의 비뚤어진 심사(7절)에 일침(一針)을 가하신 것이다. 그리고 진실의 확증을 위해 필요한 2, 3인의 증인보다 더 많은 증인들이 예수의 탁월한 능력을 확신함으로써 더 이상의 변론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었다.

(마가복음 2:12)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먼저 '놀라다'(*, 엑시크테미)는 말은 '이탈하다', '제 정신을 잃다'는 뜻으로 그 충격의 여파가 매우 큼을 보여 준다. 한편 예수의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의 반응에 대해 각 복음서 기자들은 무리들이 '두려워하며'(마 9:8), 또는 '놀라고, 심히 두려워하여'(눅 5:26)라는 표현으로 그 상황을 푹넓게 묘사하고 있다. 결국 이는 그 무리들이 크나큰 충격 앞에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충격과 공포는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자신들의 본원적인 죄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사 6:5). 그러한 사실은 대변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실로 이 송영(頌榮)은 그들이 마침내 그들 앞에 계신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하나님의 능력을 대변하는 자, 다시 말하면 메시야로 믿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모습이다.

(마가복음 2:12)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누가의 평행구(눅 5:26)에서는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묘사함으로써 표현상의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근본 의도는 그들이 과거에 이런 일을 전혀 보지 못했지만 이제 처음으로 이런 일을 본다는 것이다. 실로 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그야말로 잠자던 유대인들의 심령에 들어닥친 하나님의 기습(attack)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기사의 중요성은 예수께서 절망에 빠진 불구자를 긍휼히 여겨 그의 중풍병을 고치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의 강조점은 바로 죄 사함에 있는 것이다. 중풍병자가 지닌 문제의 근원은 바로 죄였다. 예수께서 주로 관심을 기울이신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죄 사함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사이에 임했음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마가복음 2:13) 예수꼐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본문 이하는 예수께서 다섯 번에 걸친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동 사건 중 두번째로 해당한다. 특히 본 사건은 종교적으로 버림받은 자였던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시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가는 본 구절의 연결어로 '다시'(*, 팔린)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본 사건이 독립된 단위의 전승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시간상으로는 독립된 구절이라 보지만 내용상으로는 최초 4제자를 부르시는 1:16 이하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 사건의 장소는 갈리리 해변, 곧 가버나움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해변 지역으로 추정된다.

(마가복음 2:13)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여기서 그 가르치심에 대해 미완료 시제인 '에디다스켄'(*)을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치는 사역이 지속적(持續的)으로이뤄졌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서 가장 탁월하고 중심되는 것은 이 진리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은 4:1에서도 반복된다. 바닷가에서의 설교가 예수에게 고유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예수께서 교육의 장(場)으로 바닷가 주변의 지방을 상당히 애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교실이나 주간 계획표에 따른 정확한 교육 시간에 한정되기보다는 어떠한 장소, 어느 시간에도 항상 이뤄져야 하는 전인적이고 전(全) 공간적인 것이어야 한다.

(마가복음 2:14) 또 지나가시다가(*카이 파라곤).

이 말의 원어는 1인칭 주격 현재 분사로서 예수의 활발하고도 능동적인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이때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 지역에서의 가르치심을 마치고 세관이 있는 큰 도로 쪽으로 그 행보를 옮기고 계셨을 것이다.

(마가복음 2:14) 레위가...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여기서의 레위는 일반적으로 마태와 동일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실제로 마 9:9의 동일 사건에서 그를 마태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레위'는 그의 본명(本名)이고, '마태'('하나님의 선물'이란 뜻)는 그의 사도명(使徒名)일 것이다. 그는 갈릴리 분봉왕이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에 의해 세리로 고용되었다. 그런데 마태가 거주하던 가버나움 근교의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 다메섹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큰 도로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애굽으로 통행하던 대로가 서로 만나는 교차로 근처에 위치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다(Donald W. Burdick). 특히 이곳은 헤롯 빌립의 관할지인 데가볼리로부터 오는 여행자들이 안디바 관할 지역에 처음으로 들어서는 곳,즉 가버나움을 통해서 갈릴리와 유대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곳이었다. 한편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문자적으로 '세를 징수하는 곳에 있었다'는 뜻으로 그의 신분이 세리였음을 단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유대인의 자료에 의하면 이 세리는 두 계층의 세무 관리로 구별된다고 한다. 즉 수입세와 인두세를 걷어들이는 관리와 교량이나 운하나 국도에서 통과세를 걷어들이는 관리인데, 후자가 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세금 부과를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는 아마도 다메섹에서 가버나움을 거쳐 지중해 해변 쪽으로 가는 노상에 위치한 통행료를 징수하던 곳에서 일하였던 듯하다. 실로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한 경멸과 증오를 받는 죄인의 그룹에 속했던 자였다고 볼 수 있다.

(마가복음 2:14) 나를 따르라(*아코루데이 모이).

이 명령은 현재 미완료형으로서 단 한번의 호출이 아닌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행위를 좇을 것을 명령한 제자에의 부름이다. 더욱이 이 명령은 레위가 현재까지 수행하고 있던 직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직업(사람낚는 어부)를 선택하라는 생(生)의 변화에의 요구이기도 하다(1:16, 17). 한편 경제. 사회적으로 상당한 기득권을 가진 레위가 예수의 부르심을 순응하는 데는 주저할 요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어부는 쉽게 고기잡이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만(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몇몇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레위로서는 그의 직업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거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비록 인격적, 도덕적으로는 비난을 받던 직업이지만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유망(有望)한 직종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고 한다(W. W. Wessel). 그러나 그는 예수의 부르심에 대한 위대한 결단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의 유업과 더불어 예수의 위대한 복음 선교의 동역자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때 마태는 일반적으로 12제자 중 가장 나중에 예수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Lenski).

(마가복음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먼저 여기서 '앉아'(*, 카타케이스다이)란 '기대다', '식사 자세를 취하다'는 뜻으로 유대 전통에 따라 기대어 눕다시피한 자세를 가리킨다. 그런데 레위의 집에서 가졌던 식사는 레위가 예수의 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이제 집을 떠나고자 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베풀어진 송별회였을 수도 있고, 혹은 단순히 레위가 자기 친구들에게도 예수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해 베푼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마가복음 2:15) 세리와 죄인들이...함께 앉았으니.

여기서 '예수와 함께 앉았으니'를 뜻하는 헬라어 '쉬나네케인토 토 예수'(*)라는 말씀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함께 음식을 들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의 주인역은 레위가 아니라 예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동 식사는 인습적인 장벽을 허무시고 죄인들과 교제하기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사랑이 담긴 뜻깊은 자리였던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혹자(Lane)는 이 구절의 주석을 다음과 같이 한다. "이 구절의 관심은 메시야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집중된다. 예수께서 그 나라로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17절의 말씀과 관련지어 보면, 음식을 나눈다는 것의 근본적인 의미는 메시야의 죄 사함인 것이며, 또한 식사 자체도 메시야적 잔치를 암시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2:15) 세리.

세리들은 특히 지배자로부터 세금 징수를 청부받아 이미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온갖 수탈(收奪)을 일삼던 자를 가리킨다. 레위와 같은 경우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되었던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의 모든지방은 각기 로마 정부의 비호 아래 고유한 관세 구역을 이루었다. 특히 로마 정부에의해 인정된 피지배인 단체들과 피지배 국가들도 징세권을 행사했다. 한편 조세(tax)와는 달리 관세(customs)의 수입은 황제의 국고가 아니라 지방 군주의 금고로, 즉 갈릴리에서는 헤롯 안디바의 금고로 들어갔다. 그런데 관세의 징수는 국가 관리가 아니라 세금 청부업자(pubicani)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년 동안의 일정한 세금액을정해서 일정한 지역의 관세를 청부 맡았다. 그리하여 여분은 그들이 가질 수 있었고, 대신 모자라는 부분은 보충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부하들의 징세를 독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일반 백성에게 부과될 세금액이 거의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용하거나 문란하게 될 소지가 매우 컸다. 아니나 다를까 탐욕스런 세리들은 세액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을 멋대로 이용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마구 짜내어 갔던 것이다(Gnilka).

(마가복음 2:15) 죄인들.

이 말은 모세의 율법과 관련하여 바리새인들의 해석대로 따르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도덕률을 범한 자들'이라고 하는 일반적 통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마가가 그것을 의도하였다고 하면 '세리와 또 다른 죄인들'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낱말은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자기들의 서기관적 전통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으므로 천민들이라고 비하하여 가리키는 사람들의 계층적 통칭인 전문어이다(요 9:24;Lane). 예수께서 자신의 핵심적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처럼 평판이 좋지 않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포함시킨 것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고대 사회에서는 친분을 나타내는 표시)은 '서기관들'이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16절).

(마가복음 2:15) 그러한 사람들이...따름이러라.

세리와 죄인들은 그의 동료 레위가 초대한 식사에 기꺼이 응했을 뿐 아니라 레위의 앞선 바대로 그들도 예수의 가르침과 친화력에 쉽게 동조되었다. 실로 그들은 가난한 마음으로써 영혼의 의사요, 친구요, 진리되신 예수를 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마가복음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호이 그람마 테이스 톤 파리사이온).

좀더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바리새파에 속하는 서기관들'이 된다.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평민 계층의 종교 집단으로서 율법과 유전에 있어서 철저한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들이며, 특히 그들은 의식법에 강조점을 두었다(Donald W. Burdick).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 들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극히 배타적이었고 정죄하기 일쑤였다(요 7:49). 한편 이 종파의 기원이나 선조에 대해서는 별반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마카비 시대에 맛다디아(Mattathias)와 그의 아들들과 힘을 같이 했던 경건한 유대인들인 하시딤(Hasidim)의 후예였을 가능성이 있다. 종교적 자유를 쟁취한 뒤에, 그들은 정치적 독립도 요구하면서 대부분 마카비 일가를 떠났다. 바리새는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그 뜻은 '분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그들은 흔히 '분리주의자'로 취급되었다. 한편 그들이 '바리새인'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가 통치하던 때로 여겨진다(B.C. 135-104).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바래새인들이란 율법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종교적 항목들을 준수함에 있어 자신의 나라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탁월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한 무리들의 유대인들'이라고 했다(Jos., Wars I. 110V. 2). 실로 그들중에 많은 사람들은 경건하고 믿음이 깊었지만, 예수와 충돌을 일으켰던 자들은 전통적 종교의 가장 나쁜 요소들, 예컨대 시기, 위선 및 종교적 형식주의 등에 집착(執着)한 그릇된 종교관을 보여 주었다. 이에 대해 메츠거(Metzeger)는 이야기하기를 '바리새주의는 종교의 존재의 의의를 율법에 일치시키는 것으로 보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만 약속된다는 식의 종교 개념을 가질 때 나타나는 왜곡된 현상이다'라고 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가장 격렬한 논쟁의 초점은 죄의 정의에 관한 것에 모아졌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정의에 따라 예수가 계율에 정한 바 죄인들과의 교제 금지를 무시했기에 그가 바로 죄인이며,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다르게 죄를 정의했다. 예수는 가르치시길 비록 인습적으로 죄인의 부류에 속한 자이지만 겸손히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철저히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예수의 초대에 응한 자는 더 이상 죄인으로 남아 있지 않고 '용서받은 죄인', '구주 예수와 친구된 자'로 그 존재가 변하였다고 하셨다. 이에 덧붙여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사역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에 대해서 눈먼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그들의 외식을 정죄하셨다.

(마가복음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이는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유행하던 격언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성육신(Incarnation) 목적을 이 격언을 통해 단정적으로 선언하셨다. 한편 여기 '건강한 자'란 타인에게 그 어떤 종교적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느끼는 일종의 종교적 교만자를 빗댄 말이다. 특히 치료자되신 예수의 치유 은혜를(출15:26) 거부하는 자, 그는 자칭 건강한 자인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기 의(義)를 추구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특히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말 4:2)의 치유사역에 자신의 온 인격을 내놓을 수 있는 병든 자, 곧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진정 예수의 부르심은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분의 초청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부르심이요(요 5:24), 절망에서 소망에로의 부르심이며, 죄인에서 의인에로의 부르심이다(사 1:18). 그런데 이 일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병자 의식(病者意識), 곧 자신이 결함이 있는 자로서 반드시 치료 받아야만할 존재라는 자기 존재의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눅 18:13). 실로 예수의 이 말씀은 복음의 본질을 나타낸 것이라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신다는 교리는 기독교에서 새로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어떤 유대인도 이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죄인됨을 진솔히 고백하는 자를 기쁘게 받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죄인임에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주장이다. 이는 어느 시대에 있어서도 참된 기독교의 진정하고 영광된 교리이다(Hunter).

(마가복음 2:18) 요한의 제자들...금식하고 있는지라.

먼저 본 금식 논쟁이 발생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앞절에 베풀어진 세리 레위의 잔치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금식일에 베풀어짐으로써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기 언급된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의 준수와 전통의 고수라는 점에서 바래시인들과 그 정신을 같이 한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들은 유대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둘째 날과 다섯째 날) 금식을 한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때 세례 요한은 헤롯의 궁이 있던 '마케루스'(Machaerus)에서 감금 생활을 하는 상태였다.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부재 중에도 금식을 계속 실천해 온 것은 결국 세례 요한의 평소 가르침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분명한것은 세례 요한의 금식은 그야말로 참경건과 금욕과 절제 생활에 근거한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오직 형식주의적인 입장에서 금식을 한 것이다. 한편 구약성경에 보면 속죄일에만 금식하는 규정이 나타난다(레 16:29, 31;23:27-32;민 29: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이 끝난 뒤에 부림절(Purim), 예루살렘 함락일 같은 날 등 매년네 번의 금식을 지키는 전통(傳統)을 세웠음을 볼 수 있다(슥 7:5;8:19).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엄격한 바래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눅 18:12) 금식을행했다. 어떻게 이 매주 2회의 금식이 전통이 되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이것은 경건과 자기 헌신의 표현으로 행하는 것인 듯하다. 본문이 전하는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에 관한 기사는 추측컨대 앞서 이야기한 자기 경건과 자기 헌신의 외적인 표시로서 행한 것인 듯하다(Lane).

(마가복음 2:18) 바리새인의 제자들.

이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경우이다. 원래 바리새인들은 교사가 아니므로 제자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표현은 다소 어색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일부는 서기관 계열에 소속되어 나름대로의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또한 이 용어가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의식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전문적인 용어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란 표현은 후자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Wessel).

(마가복음 2:18) 금식하는데.

왜 이 두 무리들이 금식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자 마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요한으로부터 철저한 경건(敬虔) 생활을 교육 받았던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는 그 당시 요한이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금식을 했거나, 또는 메시야 시대를 기다리는 의미에서(Lane) 금식했을 수도 있다. 또한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날이 그들이 일 주일에 두 번 지키는 금식일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금식했을 것이다. 여하튼 두 경우 다 그들은 금식을 해야 참된 경건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혹이'(마태는 마 9:14에서 이때 질문자가 요한의 제자들임을 밝히지 않고 있다)예수께서 와서 왜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을 통하여 참된 종교적 경건을 보여 주지 않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마가복음 2:19) 혼인 집 손님들이...금식할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그릇된 금식관에 집착하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비유로 답변하신다. 본 비유의 강조점은 예수와 함께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에 있다. 따라서 자기 절제와 슬픔의 표시인 금식은(삼상 31:13;삼하12:11-23;눅 5:35). 예수와 함께 있을 때는 부적절한 것이다. 유대인의 혼인식은 특히 경사스런 행사였다. 손님들은 때로는 한주간이나 계속되는 축하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처럼 즐거운 잔치 중에 금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직 그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르는 극락(極樂)의 시간들로서 심지어 율법에서조차 혼인식 전후에는 여러 의무에서 제외시키는 등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신 20:7). 한편 본문의 '혼인집 손님들'이란 문자적으로 '혼인집 아들들'로서 신랑의 친구들 및 신랑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통칭한다 하겠다. 본절에서는 특히 그들을 예수의 제자들 및 예수와 함께 천국 잔치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고 있는 구속받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는 스스로 그 잔치의 주역인 신랑으로 자처하신다(호 2:19, 20). 실로 그 잔치의 주역인 예수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기뻐하며 금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빼앗길 때에는 금식이 어울릴 것이다.

(마가복음 2:20) 신랑을 빼앗길 날...그 날에는.

이 말씀의 근본 의도는 미구(未久)에 닥쳐올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처형을 암시하려는 데 있다. 사실 예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제자들을 떠나가신 이후부터 제자들은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며, 또 금식을 하기도 했다. 한편 본문의 '빼앗길 날'에서 '날'(*, 헤메라이)은 복수인데 반해, '그 날에는'의 '날'(*, 헤메라)은 단수인 것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날은 여러 날에 해당하나 그의 죽음 이후로부터 있게 될 종말의 날은 확실히 한 단위로 취급되어야 했기 때문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이 '날'의 변화는 곧 닥쳐올 종말의 때를 예언,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마가복음 2:20) 뺴앗길(*아파르데).

이 단어는 원형 '아파이로'(*)에서 온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만(마9:15;눅 5:35) 나타난다. 그 의미는 (매우 격렬하게) '빼앗다', '제거하다'로서 어떤고통스럽고 미어지는 듯한 이별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에 대해 혹자(Bracher,Nida)는 '이와 같은 동사는 그 빼앗음이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인지 혹은 돌발적이거나 억지에 의한 것인지는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 이는 슬픔을 유발시키는 억지에 의한 빼앗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 시초부터 그의죽음에 직면했다. 예수의 제자들의 삶은 바로 이 같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실로 예수의 공생애 3년간의 모습은 바로 그들 제자들이 지니는 기쁨의 이유이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해야 할 이유가 된다. 어쨌든 자신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진 예수의 사역은 모든 죽어 있는 종교와 심령들에게 새로운 진실과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고 한다.

(마가복음 2:21) 생베 조각을...더하게 되느니라.

예수께서 도래하심으로써 시작된 새로운 진리, 새로운 교훈, 새로운 삶의 자세는 결코 옛 형식들안에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비유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새로운 복음을 상징하는 '생베 조각'은 헬라어로 '라쿠스 아그나푸'(*)라 하여 '표백 처리하지 않고, 제단하지 않은 천', 즉 새로 짠 천, 사람의 손을 거치기 전의 올을 촘촘히 한 천을 뜻한다. 이에 비해 옛 율법주의 구조와 낡은 형식 위주의 유대주의를 상징하는 '낡은 옷'은 거의 헤어져 조그마한 자극에도 찢어져 버릴 참으로 생명력이 결여된 천을 가리킨다. 이러한 생명력이 결여된 것들에 생베 조각처럼 그 활동력과 생명력이 왕성(旺盛)한 예수의 새로운 교훈과 복음을 붙이려고 하면 그 헤어짐이 더하게 되는 것이다(마9:16). 따라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바 새로운 교훈과 은혜의 복음 및 생명의 진리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 하지만 형식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옛 율법주의와는 절대로 합할 수가 없는 것이다(Lenski). 오직 새로운 진리에는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형식이 요구될 뿐이다.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고대, 특히 유목 생활을 하던 팔레스틴에서는 물이나 포도주를 염소 가죽 부대에 보관하여 이동 중에 취식했었다. 그런데 이때 새 가죽은 부드럽고 유연해서 비록 발효가 덜 된 포도주를 담더라도 신축성 있게 그 변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신축성을 잃고 늘어난 낡은 가죽 부대는 유연성이 없기 때문에 터뜨려지기 쉬웠다. 즉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생긴 가스가 낡은 가죽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다 버리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며, 어리석은 경우이다. 마찬가지로 옛 유대주의에 물든 사고와 생활 양식에다가 무한한 생명력과 폭발적 운동력이 깃든 예수의 복음을 결합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이다.

(마가복음 2:22)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본문은 5, 6C의 것으로 추정되는 베자 사본과 옛 라틴 사본에는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간혹 본문은 눅 5:38에 있는 원문을 후기에 인용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권위 있는 사본들에는 본문이 언급되어있으므로 특별히 본문의 후기 첨가설을 인정할 만한 이유가 없다. 한편 본문에 두번 언급된 '새'라는 말 중 첫번째 '새'(*,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두번째 '새'(*,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 이는 가장'최근에' 만들어진 포도주는 전혀 이상이 없이 탄탄하고 실한 '최상의'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심령과 삶에 구약 율법의 완성이요, 형식적 율법주의를 능가(凌駕)하는 새 시대의 새진리가 결합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마가복음 2:23) 안식일에...밀밭 사이로 지나 가실새.

먼저 '밀'(*, 스타퀴스)이란 밀이외에 보리, 옥수수 등을 통틀어 일컫는 '곡식'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본 사건은 유월절(4월에 해당)과 밀 추수를 기념하는 칠칠절(5-6월에 해당) 사이에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한 마가는 예수와 그 일행의 모습을 더욱 박진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즉 본문의 '지나가실 새'(*, 파라포류에스다이)는 마치 밀밭 가장자리에 있던 예수 일행이 밀밭 중심으로 들어가서 계속 지나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가복음 2:23)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여기서 '길을 열며'(*, 호돈 포이에인)란 (1) 단순히 '길을 가다'는 관용적 표현이기도 하고, (2) 마치 귀빈의 행차를 위해 도로를 정비하던 고대 세계의 풍습처럼 예수가 지나가시기 편리하도록 제자들이 길을 여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2)의 견해를 취한다면 제자들은 먹기 위해 이삭을 자른 것이기 보다 오히려 길을 만들기 위해 이삭을 잘랐다고 하는, 마태의 보고와는(마 12:1) 다른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분명 제자들은 먹기 위해 이삭을 잘랐음을 알게 된다. 한편 예수의 제자들 이행한 일은 율법에는 분명히 허용되고 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신 23:25). 굶주린 이웃이 타인의 곡식 밭에 들어가서 그 주린 배를 채운다 할지라도 관용과 긍휼의 정신으로 그것을 용납하라는 은혜로운 규정이다. 그러나 아울러 율법은 땀흘려 농사 지운 타인의 소유가 지나치게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굶주림을 채우는 것 이상의 반출(搬出)이나 절취는 엄격히 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과 공의가 충만한 그야말로 조화롭고 온전한 생활 규범이다. 즉 하나님을 더불어 사는 삶을 살도록 배려하셨고 모두의 권리를 인정하고 공익을 보호하시려고 하셨다. 여하튼 이러한 은혜로운 규범에 따라 마침 시장했던 제자들이 타인의 밭에서 이삭을 자르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제자들이 이삭을 자르고 손으로 비비어 먹은(눅 6:1) 그때가 바로 안식일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하면 이는 두 가지 죄를 범한 것이된다. 첫째, 이삭을 잘랐으니 이는 안식일에 추수한 결과가 되므로 죄악이 된다. 둘째, 자른 이삭을 손으로 비볐으니 이는 안식일에 타작한 결과가 되므로 죄악이 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힐델 학파와 샴마이 학파간에는 다소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교내에서는 안식이에 지켜야 할 조항을 39개로 규정해 놓고 있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이 이날 보여준 이러한 행위는 의식적 율법 준수를 가장 중요시하는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마가복음 2:24) 바리새인들이...못할 일을 하나이까.

제자들의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비판적 시비에 걸려든 까닭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행동 때문이 아니라 그 행동이 안식일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은 이삭을 자르는 동작을 일종의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추수작업이라고, 또 누가의 보고에서 보듯이(눅 6:1)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을 타작하는 행위로 해석하였으며, 제자들의 단순한 그 행위를 안식일의 규례를 깨는 불경건한 노동 행위라고 본 것이다(출 20:10). 사실 율법은 안식일에 곡식 거두는 일을 공적으로 금지하고 있다(출 34:21). 그리고 '미쉬나'에 보면(M. Sabbath 7:2) 안식일의 금지 사항 39개 항목 중에 세번째로 금하고 있는 것이 곡식의 수확 행위이다. 한편 서기관들의 견해에 따르면 제자들의 불미스러운 행위에 대한 책임은 선생에게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직접 항의하였다. 저희들은 법적으로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고 있는가의 할라카(Halakha)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짐작컨대 그들이 이처럼 예수께 분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안식일을 범한 사실에 대한 처벌에 앞서서 법적으로 반드시 경고해야 한다고 하는 조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Lane).

(마가복음 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예수께서는 반대로 질문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처하셨다. 여기서 예수의 질문은 그들로 하여금 긍정적인 답변을 유도하시려 한 것이다.그가 언급하신 사건은 삼상 21:1-6에 기록된 것이다.

(마가복음 2:25) 다윗이...시장할 때에 한 일을.

다윗과 그 무리들은 사울왕의 살해 위협에 쫓기며 핍절하고 시장할 때에 진설병, 곧 고운 가루로 구원 성결한 상 위에두 줄로 진설한 12덩이의 떡을 먹었었다. 본래 율법에는 매안식일에 새로운 떡을 성소에 들임으로써 이전것과 교체하였으며 교체된 떡은 제사장들이 먹도록 되어 있었다(출25:30;35:13;39:36;레 24:5-9;Jos., Antiq. III. 255-56. X. 7). 따라서 다윗의 행동은 엄연히 율법에 반(反)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인해 구약 어느 곳에서도 정죄받지 않았다. 실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는 안식법에 위반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아니고 하나님 시각에서는 그러한 위반도 용납되고 정당화 될 수 있는 좀 더 고차원적이고 궁극적인 법률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인간의 핍절과 배고픔은 종교의 의식주의보다 상위(上位)의 법에 해당한다'(Earle)는 사실이다. 진정 예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원초적인 필요가 단순한 모든 의식 규범과 형식적 종교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Donald W. Burdick).

(마가복음 2:25) 읽지 못하였느냐(*우데포네 아네그노테).

'읽다'에 해당하는 '아네그노테'는 원형 '아나기노스코'(*)의 제2 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다시', '새로운' 등의 뜻을 나타내는 '아나'(*)와 '배우다', '알게 되다' 등의 뜻을 나타내는 '기노스코'(*)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정확히 알다', '이해하다', '구별하다' 등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문은 구약에 기록된 바 다윗의 일을 읽고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느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마가복음 2: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피 아비아다르 아르키에레오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내용은 삼상 21:1-6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기록된 내용에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아비아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히멜렉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아비아달의 부친인 아히멜렉(아비멜렉)이 대제사장이었고 다윗이 진설병(陳設餠, 거룩한 떡)을 얻었던것도 아히멜렉에게서였다. 이 구절과 평행되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말이 기록되지 않았고 또 상당수의 사본에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려움을 더해 준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제사장 직무에 임했기 때문에(Grotius),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혼용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등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가장 합리적인 추론을 한다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브루스(Bruce)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는데, 아비멜렉의 아들은 두 가지 이름 곧 아비멜렉과 아비아달로 혼용하고 있다(삼상 22:20;삼하 8:17;대상 18:16;24:3, 6, 31). 그리고 또 다른 추론을 해 본다면 다윗이 놉에 갔을 때 아비아달 부자가 함께 그곳에 있었고, 또한 함께 다윗의 무리를 돌보아 주었다. 그후 아버지 아히멜렉은 사울의 손에 죽고 아들 아비아달이 그 대(代)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R. C. H. Lenski). 따라서 본문에서 마가는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자연스럽게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마가복음 2:26) 하나님의 전.

직역하면 '하나님의 집'으로서 예루살렘 근처 놉에 있던 성막, 곧 회막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명칭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라는 의미에서 신.구약을 통틀어 자주 사용되던 용어이다(대하 5:14;딤전 3:15).

(마가복음 2:26) 진설병을 먹고.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사울을 피하여 놉에 갔을 때 매우 굶주려 진설병을 먹었었다. 진설병은 문자적으로 '그 얼굴(앞에 놓여진)의 떡'(*, 레헴 판님)이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전하는 대로 하나님의 현존하시는 처소인 성소에 진설되는 떡 곧 제단의 떡을 말한다(출 25:30;35:13). 이는 곧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헌상(獻上)하는 예물로서 궁극적으로 생명의 떡(요 6:35)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를 상징한다. 성소 안에는 금으로 입힌 탁자 위에 새로 구운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을 두 줄로 매 안식일마다 진열하도록 율법에 규정하고 있다. 이 열 두 덩이의 진설병은 향과 함께 봉헌되고, 그 다음 주의 진설병이 제단에 놓여질 때까지 그 자리에 계속 놓아 둔다. 다시 새로 구운 진설병을 바꾸어 놓고, 먼저 봉헌했던 진설병은 성소에서 물려 제사장들이 먹는다(출 25:30;레24:5-9). 따라서 이러한 이유에서 진설병을 먹는 것 자체는 위법이 아니다. 예수께서 주안점을 두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하나님의 심령을 닮은 인간인 다윗이 기근으로심한 고통을 받을 때 그는 제사장에게 도움을 청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진설병을 얻었다. 사실 속인들이 진설병을 먹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레 24:9). 그러나 하나님에게 바치는 거룩한 떡을 먹어서라도 생명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그 당시 다윗의 상황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꺼이 용인(容認)해 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실증법이었던 율법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의 자연법이 바르게 적용된 한 실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유에서, 아니 그 이상의 이유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 합법적인 일이며, 그들이 손으로 비비어 먹은 그 곡식 낟알은 그들의 배고픔을 충족시켜 생명을 보호해 주는데 참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마가복음 2:27) 또 이르시되.

마가는 예수의 독립적인 말씀을 어떤 주제와 관련시켜 삽입하고자 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하곤 했다(4:2, 11, 21, 24, 26;6:10;7:9 등). 여기서의 진술도 그런 방향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분명한 본구절의 배경은 설명되지 않았으나 그 내용의 방향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곳의 논쟁 기사에는 특별히 적절한 표현인 것이다.

(마가복음 2:2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그 자체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밝히셨다.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즉 노동으로부터의 안식과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 위함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 당시로서 그렇게 과격한 표현은 아니었다. 예컨대 랍비 시므온 벤 메나샤(Simeon ben Menasya)도 '안식일이 너희에게 맡겨진 것이지 너희가 안식일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MelkitaShabbata I;출 31:14). 한편 이 교훈에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란 부차적(副次的)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만일 안식일의 완전한 휴식이 사람에게 오히려 피해와 상처를 입힌다면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의 노동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생명과 구원에 크나큰 촉매제가 된다면 차라리 휴식을 포기하고 소매를 걷어 붙여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안식일 휴식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그들의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삭을 비비어 거두어 들이는 일종의 작은 노동을 용인하시고 묵허하셨던 것이다. 실로 사람이 안식일만을 위하다 멸망하는 것보다는 생명 보존과 새 생명 탄생을 위해 안식일 굴레를 벗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처럼 율법의 멍에는 인간을 법조문에 찌들게 하지만 예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며, 또 궁극적으로 생명과 환희를 맛보게 한다(마 11:30).

(마가복음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먼저 '이러므로'란 안식일 논쟁의 비약적 결론구를 제시하기 위한 접속어라 할 수 있다. 실로 예수는 당신이 가르치시는 진리에 대해 단정적이고 선언적으로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 보이신다. 유대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려는 노력에 인간의 전생활 영역을 안식일 규정으로 얽매어 놓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편협한 율법주의에 빠져들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안식일 관행은 이제 당신의 뜻과 목적에 따라 새롭게 규명(糾明)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특히 이 같은 선언은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마음대로 뜯어 고치시겠다는 자기 고집에서가 아니라 그 규정을 새롭고도 온전하게 주석하시고 설명하실 수 있는 당신의 자격과 신분을 선언하신 것이다(Donald W. Burdick). 한편 본문의 '인자' 선언은 마가가 관심을 가진 바 '인자 기독론'에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10절 주석 참조) 드러난 바 영광스런 하늘의 인자는 지금 바로 이곳에 나타나셔서 죄 사함의 권세를 행사하실 뿐 아니라 특히 안식일 논쟁의 결론을 내리시는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Grant, Taylor). 자세한 것은 눅 1:3-5 주제 강해 '안식일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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