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7장 성경강해

2024. 3. 25. 13:31구약 BIBLE/누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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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흐름정리>

본장은 제자의 생활 원리, 믿음의 위력, 재림의 시기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교훈하셨다. 이 같은 말씀은 다가오는 수난에 직면하여 제자들에게 그들의 영적 자만을 경계하고 겸허하게 복음 사역에 매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본장 중간에 삽입된 문둥 병자 사건은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치료 받은 자가 보인 '은혜와 감사'의 태도를 강조한다.

 

<누가복음 17장 줄거리>

1. 그리스도가 실족케 하는 경우를 피하라고 가르침.

3. 서로 용서함.

6. 믿음의 능력.

7. 우리가 하나님에게 매이는 것이지, 그분이 우리에게 매이는 것이 아님.

11.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침.

22. 하나님의 나라와 인자의 임함에 대하여.

 

<누가복음17장 개역개정>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없음)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7장 성경주석>

(누가복음17:1) 실족하게 하는 것.

'스칸달론'(*)은 원래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 놓는 '덫, 올무, 파놓은 함정'(snare) 등을 의미한다.본절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시 140:5). 이는 실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되는 것을 말하기 보다는 고의로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아마도 바리새인들의 외식 행위(11:37-52)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 같다.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부터 성도들도 악의로든 혹은 그렇지 않든 간에 서로간에 걸림돌이 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늘 주의하여 피차 덕을 세우는 일에 매진해야겠다(롬 14:19).

(누가복음17:1) 화로다.

'우아이'(*)는 슬픔이나 불쾌함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나 여기서는 비난이나 단순한 비탄의 절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심판 선언의 뜻으로 쓰였다. 즉 여기서의 화, 재난이란 '바다에 던지우는 것' 즉 죽음보다도 더 무섭고 가혹한 형벌(形罰)인 영영히 타는 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6:24-26의 부요한 자에 대한 심판 선언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또한 이는 복있는 사람(마 5:3-12)의 '복'과 대조되는 말로서 불신자들 모두에게 미칠 지옥의 판결의 의미로 볼 수 있지만, 복음서에서는 특히 바리새인을 위시한 당시 유대교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직접 던져진 경고로 자주 나온다(11:42,46). 그들은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하노라고 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뜨리는 격이었다(마 23:16).

(누가복음17:2) 이 작은 자.

'미크론 투론'(*)은 문자 그대로 어린이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Manson), 제자들일 수도 있으며(Klostermann,Michel), 복음이 전파된 가난한 사람들일 수도(Kummel,Grundmann) 있다. 마 18:6에서는 이 말씀이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과 관련되어서 나오고 있는데, 이때의 소자는 분명 문자 그대로의 '어린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절에서 '작은 자'를 지시 대명사 '투톤'이 수식하고 있으며 또 제자들의 칭호가 5절에서 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사도'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12사도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 또는 제자가 되려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 중에서의 초신자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있다. 이제 막 믿음의 문턱에 들어선 새신자들은 대개 연약하고 흔들리는 믿음을 지닌 상태기 때문에 이단 사설(異端邪說)에는 물론이고 복음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의해서까지 실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기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까지 말했다(고전 8:13).

(누가복음17:2) 연자맷돌.

방아간에서 사용하는 회전형 맷돌. 곡식을 빻는데 사용하는 이 도구는 손으로 돌리는 맷돌에 비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해서 돌린다. 본절에서의 연자 맷돌은 한 가운데 구멍을 뚫은, 맷돌의 윗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멧돌을 매어 바다에 빠뜨리는 것은 고대 로마, 그리스 등지에서 실제로 시행되던 사형법(死形法)의 일종 으로, 극악한 범죄로써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해친 자들이게 가해졌다고 한다. 본절에서 이 표현은 '작은 자'라는 표현과 대비를 이루어 타인을 실족케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 것인가를 실감있게 나타내고 있다.

(누가복음17:2) 나으리라.

헬라어 '뤼시텔레오'(*)는 '지불하다'의 뜻인 '뤼오'(*)와 '세금'의 뜻인 '텔로스'(* 의 합성어로, '대가를 지불하다'(pay) 혹은 '유익하다'(profit)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비교를 나타내는 접속사 '에'(*)와 함께 쓰여 '... 보다 차라리...더 유익하다'의 뜻이 된다. 본절에서는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임을 의미한다.

(누가복음17:3) 스스로 조심하라.

NIV성경에 의하면 이 구절은 앞의 '실족'의 교훈 속에 포함된다. 그러나 RSV성경에는 뒤의 용서의 교훈과 관련된 것으로 나와 있다. 학자들 중에도 이 구절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zahn, Stuhlmueller, Creed, Schulz), 아마도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실족케하지 말며 또한 스스로도 실족되거나 당하지 말도록 조심하라고 하는 의미일 것이다. '조심하라'뜻의 헬라어 '프로세코'(*)는 '에... 대해서 몰두하다'의 뜻으로 실족케 하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살피는데 전력을 다하라고 하는 의미이다.

(누가복음17:3) 경고하고.

'에피티마오'(*)는 책망하거나 경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 18:15-22를 보면 공동체의 어느 한 형제 혹은 자매가 범죄한 경우 일차적으로는 한 사람이 죄를 지은 당사자만 상대하여 권고하고 이차적으로는 두 세 사람이 권고케 하고 그래도 안되는 경우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안듣는 경우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다. 본절의 경계하라고 하는 말에는 마 18:15절의 이 네 단계를 모두 거쳐서 권고하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17:3) 용서하라.

'아피에미'(*)는 '죄과(罪過)를 모두 탕감해 준다'고 하는 뜻이 담겨겨 있다(마 18:27). 본절에서는 '아피에미'의 부정과거 명령형인 '아페스'(*)로 쓰이고 있어 한번 용서한 이상 어느 때라도 다시금 들추어 내는 일이 없어야함이 암시되어 있다.

(누가복음17:4) 일곱 번.

이것은, 글자 대로 일곱번을 이름이 아니고 회수의 무제한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범죄자가 회개할 때에 얼마든지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범죄자에게 대하여, (1)범죄건 그것만 용서할 뿐 아니라, (2)그가 그렇게 여러번 범죄케 되는 연약성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누가복음17:5) 믿음을 더하소서.

이 말의 헬라 원어는, 프로스데스 헤민 피스틴인데 이미 주신 믿음에 첨가해 달라 함이 아니고 새로이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는 의미인 듯하다.

(누가복음17:6)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

"겨자"는, 일년생 식물인데 자라기는 천천히 하되 10영척 혹은 12영척 높이에 이른다. 새들이 그 씨를 먹기 위하여 그 가지에 머무른다. 여기 이 비유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것은 신앙의 질을 생각한 말씀인가? 신앙의 양을 생각한 것인가?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것이 질을 생각한 말씀이라고 하였다(Lu-cas II. p. 185). 신앙은 질적으로 취급될 것이고 양적으로 측량될 것은 아니다. 신앙이 누구에게 있으면 그것이 비록 작아 보여도 천천히 될지는 모르나 반드시 큰 일을 이룬다.

(누가복음17:6)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뽕나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쉬카미노라고 한다. 팔레스틴의 뽕나무는 그 뿌리 박는 힘이 강하고, 그 한 나무가 600년까지도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 곧, 사도들이 적은 신앙이라도 가졌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어떤 어려움이라도 돌파할 줄 알고 안심하고 있을 뿐이란 말이다. 우리는 신앙을 수량적으로 더하려는 허욕과 조급을 품지 말고, 가장 적어 보이는 신앙이라도 진실하기만 하면 위력이 있는 줄 믿고 안심할 뿐이다.

(누가복음17:12) 멀리 서서.

이것은, 그들이 율법의 법규 대로 공중 위생을 위하여 사람들에게서 격리하는 행동인 듯하다(레 13:45, 46; 민 5:2).

(누가복음17:13) 소리를 높여.

이 말은, 헬라 원어로 아우토이 에란 포넨이니 "그들이"란 말이 첫 머리에 있어서 힘 있는 말투로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 행위를 주목하게 한다. 그들의 신앙은 다음 말에서 볼 수 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기 "선생님"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에피스타타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선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예수님에게 절대 순종할 의미로 이 칭호를 부르짖었다. 그 아랫 말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 대로 복종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쳐 주시는 아무런 표정이나 행동을 취하시지 않고 그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만 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에 복종하여 제사장들에게로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다. 구약에서도 나아만이 회개하고 순종한 고로 문둥병이 깨끗하여졌다(왕하 5:1-14).

(누가복음17:14) 그들이 가다가 꺠끗함을 받은지라.

그 문둥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아무런 치료 행위나 표정을 나타내신 일이 전연 없었는데 그들이 깨끗해진 것은, 그들을 고치시기 원하신 예수님의 의지 때문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증거이다. 그 문둥이들은 예수님을 순종하는 도중에 있다가 자기들도 모르게 은밀한 치료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공작은 이렇게 은밀한 방면이 많다.

(누가복음17:15) 그 중 하나가...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자의 수효는 언제나 적으니 이것이 인류의 암흑면이다.

(누가복음17: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의 감사가 겸손하니 이것이 역시 아름답다. 신자들이 받은 은혜를 인하여 감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 감사를 교만하게 하는 예가 많다.

(누가복음17:16)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사마리아 사람은 혼혈족이다. 앗수르군의 침략을 받은 후에 사마리아에 바벧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등지의 사람들이 식민되었다(왕하17:24). 여기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하셨다(18절). 종교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오히려 은혜가 귀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악한 근성이다.

(누가복음17:17)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여기 "열 사람"이란 말은, 서부사본에는, "이 열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합리하다. 아홉 사람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 열 사람"이라고 불렀을까? "이"라는 글자가 없는 것이 원본대로일 것이다.

(누가복음17:20)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볼 수 있게"란 말은, 헬라 원어로 파라테레시스이니 이 세상의 부패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모양을 이름이다. 천국은 성령님의 역사로 성립되는데 성령님의 일은 부패한 육안으로 시찰할 수 없다(요 14:17).

(누가복음17:21)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이것은 천국이 일정한 장소인 것을 부인하는 말씀이 아니다. 천국이 일정한 장소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한 우리 본문의 말씀도 증거한다. 그러면 이 귀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르는 모양을 육체적 방식으로 지적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천국은 성령을 받은 자만이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으며 설명할 수 있다.

(누가복음17: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헬라 원문에는 본문 첫 머리에 "볼지어다"라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천국이 그 때에도 임재해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여기 "너희 안에"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엔토스 휘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너희 마음 속에"라는 의미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그 때의 사회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으니만큼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곧, 천국 운동이라는 말이다. "너희 안에"란 말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악하니 그것을 천국이라고 할 수 없다. 데오도레즈안은 말하되, "이 교훈은, 복음을 믿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고, 마음에 모든 악이 가득한(눅 11:39, 44, 12:1) 바리새인에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너희 안에"란 말)은, 너의 주위 혹은 너희 환경 속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크레다너스도 이 해석을 찬성한다.

(누가복음17:22) 때가 이르리니...보지 못하리라.

여기 이 귀절에 있어서 "때가"란 말은, 헤메라이니 이는, "날들"을 의미하는바 신약 시대를 이름이다. 이 신약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자의 "날들의 한 날" 곧, 인자의 영광과 권세의 시대를 보지 못한다. 이 모든 날들(신약 시대)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니 사도들과 신자들은 핍박을 받으면서 전도하게 된다. 그리고 영광과 권능으로 오는 종말적 천국에 대하여서는 누구든지 그것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번개와 같이 누구나 알 수 있게 임한다.

누가복음17:2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온 천하 사람들이 다 함께 알 수 있도록 오실 것이므로 "재림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가복음17:24) 번개가...그러하리라.

이것은, 주님의 재림 양식을 가리키는 바 재림이 모든 사람들에게 볼 수 있게 실현됨을 이름이다. "자기 날"이란 어귀의 "날"이란 명사는 단수니 여기서 재림의 날을 이름이다.

누가복음17:25 윗절에 영화로우신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시다가 여기 와서는 그와 같은 재림의 영광은 그의 받으실 고난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시킨다. 그의 구속 사업은 그의 고난을 밑천으로 하여 완성될 것이다(8,9).

(누가복음17:26) 인자의 때.

이 말을 직역하면, "인자의 날들"이라고 할지니 이것은 신약 시대와 및 주님의 재림 시일을 의미한다. 신약 시대에는 복음을 전하는데 이 복음 운동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니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신약 시대는, 재림을 목표한 시대라는 의미에서 "인자의 날들"이라고 칭함이 되어 있다.

(누가복음17:27)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여기 "까지"란 말은, 사람들이 이 세상 생활에 취하여 거기서 낙이망반(즐기며 돌아 오기를 잊음)하여 멸망점에까지 이르러도 회개할 줄 모르게 되는 위험성과 불회개의 근성을 통탄하시는 암시이다.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이 말이 헬라 원어대로는 그 동사들이 과거미완료로 되어 있으므로 그 행동의 계속성을 의미한다. 그 때의 인간들은 이 세상 생활에만 전념하고 천국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 생활 그것이 죄는 아니나, 그것이 인간 생활의 중심이 되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을 천국에서 이반시키는 죄가 된다. 인간은, 죄 아닌 것을 가지고 죄 되게 사용하는 때가 많다. 식음가취가 무슨 죄리요마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위주함은 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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