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20. 10:10ㆍ구약 BIBLE/이사야
<이사야 64장 줄거리>
1.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함
5. 백성의 죄에 대한 진노
8. 용서와 회복을 위한 간구
<이사야 64장 개역개정>
1.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3.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5.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9.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10.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11.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
<이사야 64장 성경주석>
(이사야 64:1)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하나님은 폭풍, 불 그리고 구름 가운데 땅 위에 내려오시는 분으로 묘사되어지곤 하는데 그 목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그 백성을 축복하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대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이다(시18:9; 144:5). 토론의 여지없이 여기서는 후자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 64: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여기 사름을 당하고 끓음을 당하는 것은 '산들'(1절)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임하실 때 그 단단한 산은 불을 밭고 그 강한 열기의 작용으로 인해 액체처럼 밑으로 흘러 내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것인데, 특히 화산을 연상케 한다. 저자가 화산 폭발을 보고 그 이미지를 본절에서 인용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리아, 팔레스틴 및 사해 주변에서 당시 화산 분출이 빈번했다는 역사적 고증을 고려할 때(Lyell)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아무튼 저자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문학적 혹은 실제적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의 막강한 영향력을 묘사하고 있다.
(이사야 64:3)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
이전에 결코 목도하지 못했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을 가리키는데, 그 일이란 출애굽 사건을 뜻한다.
(이사야 64:3)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이것은 불과 연기 가운데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셨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출19:18). '진동하였사오니'(*나졸루)보다는 '흘러 내렸으니'가 더 원문적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이 역사가 자신들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사야 64:4)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여기 '앙망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인데, 바울은 이 같은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고 있다(고전2:9).
(이사야 64:4)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본 구절을 바울은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자'로 적고 있다(고전2:9). 이 같은 사실 때문에 어떤 학자는 바울이 원문을 오해했거나 원문이 파손되어 이 부분만 외경의 유사 부분에서 인용했다고 주장하거나(Lowth), 혹은 이를 바로 앞의 '들은자도 없고'와 표현만 다른 반복 구절로 보기도 하나 근거없는 주장이다.
(이사야 64:5)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
'기쁨으로 기꺼이 의를 행하는 자'란 뜻이다(요7:17; 행10:35).
(이사야 64:5)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
원래 '기억하는 자'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경이로운 구원 역사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그 하나님이 바으실 만한 기도, 예배, 찬양을 드리는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길'이란 율법을 뜻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이사야 64:5) 선대하시거늘.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으로 언약 관계를 설정하셔서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에게 평화, 안정을 주시고 계속적으로 우애를 나누시는 것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뜻한다.
(이사야 64:5) 진노하셨사오며.
이것은 탄원자의 깊은 사색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자비가 있으시고 그 언약 백성을 축복하는 분임을 알면서도, 본절의 '우리'는 하나님이 큰 진노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히 그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의 죄악과 타락상에 대해 통절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진정한 회개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그 마음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이다(눅18:13,14).
(이사야 64:5)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여기 '바헴'은 '그들(혹은 그것들) 안에'로 번역될 수 있는데 그 선행사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난해 구절로 만들어버린다. '그들(혹은 그것들)'에 대한 해석으로는, 먼저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가 있다('선대하시거늘'). 이 해석을 따를 경우, 본문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적 자비'를 뜻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원한 언약적 자비 때문에 이스라엘이 구원얻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피력하는 대목이 되어버린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 선행사를 바로 앞구절에 있는 '범죄'로 보는 해석이다. 이 해석을 따를 경우, 본절 하반절은 그 오랜(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람'은 '영원히'로 주로 번역되나 '옛날', '오랫동안'으로 번역되기도함)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조차도 할 수 없어 애타하는 심정을 묘사하는 대목이 된다. 이 경우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그 의미가 일치한다. 우리는 후자의 해석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중요한 전제인 '바헴'을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로 보는 근거가 타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절 이후 문맥을 고려할 때 후자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로 자신들이 오랫동안 범죄한 사실을 들고 있다.
(이사야 64:6) 부정한 자.
레위 기적 의미의 오염되거나 더러워진 그 무엇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모세의 율법에 따른 오염되거나 혐오스러운 동물(레11:29,30), 인간(레15:2-12) 등에 특히 문둥병자에게 주로 적용되었는데(레13:3) 이 같은 자는 성도의 회중에서 추방당하였다.
(이사야 64:6) 더러운 옷.
문자적인 뜻은 '더러운 걸레'이다. '사용한 생리대'를 뜻하기도 한다(레15:33; 20:18).
(이사야 64:7) 스스로 분발하여.
이는 '깨어나다', '일어나다'는 뜻인 '우르'의 히트파엘형(강의 재귀형)으로서 눌려 있던 영적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 전체는 영적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영적 무기력 상태를 깨닫지도 못했다.
(이사야 64:7) 얼굴을 숨기시며.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신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 은혜를 중단하자 많은 결과가 발생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이 빠졌던 영적 무기력이었다. 물론 하나님이 은혜 베풀기를 중단하신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이사야 64:7)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문자적인 뜻은 '녹게 하셨나이다'이다. 얼음 따위가 녹아 내리는 모습 따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본 용어는 주로 잇그라엘의 대적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초월적인 현상 앞에서 공포로 떨 때의 심적 상태를 묘사할 경우 사용되고 있는데(출15:15), 여기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다.
이사야64:8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자신들을 진흙에 비유하고 있다(45:9; 렘18:6). 토기장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흙을 주무른다. 진흙이 어떤 모양의 용기가 되는 것은 혹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에 달려있다. 성경에서 본 토기장이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본절에서 이스라엘은 자손들의 운명, 존재 자체가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하는 까닭은 구원을 호소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그들 스스로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오직 그들의 운명을 쥐고 계신 하나님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구원을 호소하려는 것이다.
(이사야 64:9)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여기 '주의 백성'이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며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읽게 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언약 때문에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징벌에서 놓이고 다시 언약 백성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로 나가는 출발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의 호소이다.
(이사야 64:10)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지금 서술된 장면은 그 성취 시점이 미래이다. 말하자면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시점은 서술된 내용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미 성취된 듯 완료 시제로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내용이 미래에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이 담겨있다. '거룩한 성읍들'에 대해 어떤 학자는 동일한 예루살렘을 고지대, 저지대로 나누고 있는 예가 없으므로 이 견해는 받기 어렵다. 아마도 예루살렘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 본토가 쑥밭이 되버린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복수형을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이사야 64:11)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성전.
여기 '찬송하던...성전'이란 하나님께 예배하던 성전을 가리킨다. 지금 이스라엘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요소는 전토나 가옥의 파괴 및 손실이 아니라 그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예배 처소로 삼아왔던 성전의 파손이다. 진지한 회개의 일면이 엿보인다.
(이사야 64:11) 즐거워하던 곳.
원문 직역은 '소망의 대상들'이다. 성전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살던 가옥들 그리고 온 도성을 가리킨다.
(이사야 64:12) 일이 이러하거늘.
여기 '일'이란 '이러한 것들', 곧 지금까지 자세히 열거한 재앙들을 가리킨다(10,11절). 참 회개(5절)와 재앙의 진상을 아뢴 후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구약 BIBLE > 이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66장 성경주석 (0) | 2022.07.21 |
---|---|
이사야65장 성경주석 (0) | 2022.07.20 |
이사야63장 성경주석 (0) | 2022.07.20 |
이사야62장 성경주석 (0) | 2022.07.19 |
이사야61장 성경주석 (0) | 2022.07.19 |